안녕하세요, 님~
깊어져 가는 가을 만큼 마음 깊은 곳의
기억들이 문득 문득 떠오르는 계절인 것 같아요
슬펐던, 행복했던, 힘겨웠던, 즐거웠던 그 모든 순간들이
붉게 타오르다 바닥을 뒹굴고 사라지는 단풍처럼
노오랗게 거리를 물들다 바람에 한 웅큼씩 이파리를 잃고
앙상하게 변해가는 은행나무처럼
결국은 금새 지나가지만
그래도 그 한 때의 화양연화로 우릴 위로해주듯
아홉번째 'Fable'이 님 마음을 위로해주길 바라며
두 손으로 공손히 님의 발등 위에 전해드려요~📬
유튜브에서 우연히 발견한 '마리모 이야기'
11분의 짧은 영화 한편으로 시작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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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어서 빨리요!!!
흰 눈으로 덮이기 전에 계절을 가슴에 담아보아요~📷🍁🎨
돌아오지 않아요 지금의 님을 둘러싼 색과 향과 소리와 이 모든 느낌은,
기억은 덧 씌어지니까 소중한 순간은 글과 사진으로 남겨보아요.
우린 페이블러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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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어떤 시선'에 담긴 사진들을 모두 보실 수 있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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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Book Curation은 '짱고아빠', '짱고책방', 글도 사진도 트렌드도 놓치지 않는 월비의 탑지성 민혁님이 소개하는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입니다. 아래 링크 타고 '짱고책방' 인스타그램, 블로그, 브런치도 살펴보시고 감성 충전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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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해요. 여긴 회사잖아요. 제가 선배 입장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다희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왜 그 사람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따끔거릴 뿐. 그녀는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그 날 사람들에게 다른 식으로 말할 수도 있었으니까. 다희 씨랑은 말이 잘 통해서 친해졌어요. 아, 다희 씨 없는대서 다희 씨 이야기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게 말하면 따라붙을 질문이 귀찮고, 어색해질 공기가 두려워 그렇게 말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니까(p. 118)
최은영의 사람들은 늘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한다. 특별히 무엇이 결핍되거나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 재미있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고, 따돌림 당하는 것이 두렵고, 힘 있는 사람이 선택을 강요할 때 그 힘에 짓눌릴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가끔은 삶의 용기를 내기도 하는 사람들. 그 평범한 사람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빛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밝든 희미하든, 또 붉은 색이든 파란색이든. 그것들이 어우러지며 삶이 되는데 그 삶은 좋거나 나쁜 게 아니라, 위대하거나 쪼잔한 게 아니라 그냥 삶이라고. 다섯 달란트도 한 달란트도, 그저 누군가에겐 하나의 삶이라고. 그리고 그 각각의 빛을 모아 저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 아름다운 거라고.
최은영의 다른 책도 그랬지만 이 책은 특히 그랬다. 단편 속 하나하나가 이렇게 애틋하고 마음이 갈 수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 각자의 빛을 내고 있지만 그 빛을 받아주지 않거나, 혹은 덮어버리려는 이들 앞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오해와 편견을 참아내는. 행여 그가 다칠까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마는. 그들의 모습 하나하나에서 내가 아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책의 제목과 표지가 이렇게 어울릴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 아주 희미한 빛이라도 우리게 존재하기에 완전한 어둠은 아니다. 아주아주 작은 빛이지만 우리는 그 빛을 뿜으며, 마주하고 있다. 결국 이렇게 삶은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평범한 이들을 위한 최은영의 애(표)가에 다시 한번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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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현재 월비책방에서도 대여가 가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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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주 챌린지(35th week~39th wee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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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작가별로 읽을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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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다. 감사하다, 또 내려갈 수 있으니까.
- 박경선, #34, 20240930
아무것도 아무일도
어둠이 내맘을 물들어
아무리 둘러봐도 불빛 하나 안보이고
침묵에 빠진 세상에 들리는건 내 숨소리뿐
아무도 날 붙잡고 있지 않은데
갯벌에 파 묻힌 손발인듯 움직여지질 않아
두눈만 남긴 채 묻혀있는데
두눈에 담긴건 어둠뿐이라
이게 죽음인가 싶은데
호흡이 살아있어
입술에 짠맛이 감돌아 바다인가 싶은데
눈 앞이 뿌애져 내 눈물에 잠겨가는 걸 알아챘어
눈물로 눈을 씻고 돌아보니
유리 구슬 속 내 눈물에 잠겨있는 나
거대한 암흑의 우주속에 던져진 내가 담긴 유리 구슬
별을 찾아 밤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겐 별처럼 보이려나
그럼 내가 봤던 밤하늘의 별들도
누군가 담겨있는 눈물 구슬이려나
- 김경태, #41, 2024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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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옆에 앉아 있어도 인사를 건네지 못하는 내가, 너에게
오랜만에 집회에 몰입해서 참여하고 있었어, 그러다 고개를 오른 쪽으로 돌렸는데 너가 앉아 있더라. 있지, 나는 그 때부터 남은 시간 내내 어떻게 너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할 지 생각 했어. 너가 어쩌다가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보고 인사를 먼저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는 절대로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을 것도 알았기에 너무 마음이 아팠어.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 인사도 편하게 하지 못하는, 아는 채도 하지 않는 사이가 됐을 까.
너와 내가 왜 이렇게 됐는 지는 모르겠어. 너는 늘 먼저 내게 밥을 먹자고 하지만, 언제 밥 먹자고는 하지 않았고 나는 너에게 우리 언제 밥 먹는 지 물어보는 사이였던 거 같아. 너는 나에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너를 알아봐 주는 고마운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상하게 너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날에는 마음이 시렸어. 왜냐면 너는 너의 이야기를, 너의 이야기를 내가 들어 주기를 바란다고 생각하고 잠잠했던 것이었는데, 너는 내 이야기를 들을 마음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너는 내가 동성이 아니 라서 불편했는 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가 이성이라서 더 편했는데 그게 너에게 나를 이렇게 대하는 시작이 되었을 까. 너는 내게 너를 편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래서 그랬지. 그건 너도 알 거야. 여러 밤의 수다와 쌓인 작은 만남들이 나는 정말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시간이었거든. 그래서, 그래서 어제 나는 너가 나를 모른 채 일어나, 내 옆자리를 느끼며 너를 생각하며 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울었어. 그 소리에 너가 돌아볼 까봐.
주님이 내 기도를 응답해주실 것이라 믿어. 그 기도가 무엇인지 너는 모르겠지. 그저 너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 앞에서는 나를 보면서 반갑게 인사할 것이고, 다시 내 옆에 앉아 있어도, 너 역시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네지 않는... 그럴 거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 지 나는 정말 모르겠어. 너는 너의 책에, 내가 너를 얼마나 다정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썼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으니까. 설마 그 때가 이런 관계의 시작이었을 까.
- 박경선, #35, 20241008.
요가를 빠지고
지난 주에는 임시공휴일과 공휴일로 쉬어, 오늘이 요가 레슨 새로운 달의 첫 날이다. 그런데도 오늘 요가를 빠지고 fable을 쓰고 있다. 요가 가려고 옷까지 입었지만, 그대로 앉아 랩탑을 켜고, ‘콜록콜록이 더해졌고 감기가 심해지고 있으니 가지 않는 게 맞아’하면서 계속해서 타이핑을 하고 있다. 지웠다 썼다 반복하면서, 채워지는 공간에 위로를 느끼면서 어깨를 들썩이다가 그만 자야겠다, 한다. 얼른 나아야지, 그리고 ‘너’에게 인사를 어떻게 건낼 수 있을 지 기도하고, 또 눈물이 나면 울다가 자야지.
- 박경선, #36, 20241008.
D-142
키아오라, 키위 따러
점, 여정의 시작
이응을 썼을 때, 출발한 그 마음
기도하고 자라
이응이 그어졌다, 도착한 그 시간
10시간 대기
번지점프를 하다
롯지의 밤
양치기 개를 따르라
바나나 브레드, EGG 이그
넬슨의 바다
웰링턴의 바람
테 아나우 타우포
Bye, Marie.
- 박경선, #37, 20241010.
우는 천사
한 아이가 길가에 서서
작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
울고 있는 걸까?
우는 것이 아니다
저 조그마한 아이는 아마도
자기가 겪기에는 너무도 큰
고통과 비참함을 보았던 것이다
어른이라고 하는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온갖 불행과 부정한 것들을
못 본 것으로, 없었던 일로 여기고자
그렇게 눈을 가리고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 강하람, #12, 20241011.
Death race
사람의 몸안 내용물의 70%는 물이라는데
그래서 밥은 굶어도 괜찮지만
물이 없으면 죽는다지
사람의 마음속 내용물의 70%는 사랑일까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물 없는 몸뚱이처럼 마음이 말라 죽어버린다지
물 없는 몸뚱이
사랑 없는 마음
사람을 더 많이 죽이는 건 어느 쪽일까
- 김경태, #42, 202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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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표준국어대사전에 몸살은 ‘몹시 피로하여 일어난 병. 팔다리가 쑤시고 느른하며 기운이 없고 오한이 난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살’은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깨뜨리는 모질고 독한 기운을 뜻하고 그러한 기운을 푸는 걸 ‘살풀이’라고 하는데, 몸살이 낫도록 쉬는 걸 몸살풀이라고 하는 걸 보면 몸살의 어원을 짐작할 수 있다.
뜬금없이 ‘몸살’을 검색해 본 건 내가 지난 한 주 내내 몸살을 앓았고 아직도 몸이 느른하기 때문이다. 지난주 월요일 출장 길 아침 시원하게 고속도로를 달릴 때까지만 해도 이리 살맞은 일주일이 될지 전혀 상상한 바가 아니었다. 월요일 출장 중에 땀흘리고 오밤중에 찬바람 쐬고 그대로 자고 일어나니 대번에 몸살을 맞았다. 화요일 점심 여차여차 충남에서 서울까지 식은 땀 흘리며 귀가해서는 그대로 뻗어 버렸다. 가족들은 감기 옮는다고 여행 가버리고 홀로 다음날 한글 날 공휴일을 지나 목요일까지 타이레놀과 포카리스웨트로 버텨내고 목요일 아침에 출근했다가 결국 반차를 내고 병원 가서 수액 맞고 집에 돌아와 누우니 조금 살 것 같아졌지만 당장 금, 토 역시 출장이 잡혀 있어서 제대로 쉴 틈이 없었다. 일요일에는 부모님 두 분 모신 파주에 형제들 다같이 성묘를 가서 추도 예배를 드렸다. 무신론자나 다름없는 형제들 덕분에 늘 예배 준비는 내 몫이라 역시나 쉴 틈이 없이 주일까지 보내고 나니 또 무리했는지 이번엔 배탈이 나버려서 이번주 월요일도 종일 고생하다 저녁 퇴근하고 병원가서 약 처방 받아서 먹고 나니 조금 속이 진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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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우니 엄마의 배숙이 그리워진다. 어릴적 심하게 몸살을 앓으면 엄마가 배숙을 만들어 주곤 했다. 요리는 젬병이지만 꿀에 푹 고아지면 종이 조가리라도 맛이 없을 수가 없으니 가끔은 아프지도 않은데 배숙이 먹고 싶어 꾀병 앓이를 한 적도 있었다. 배 윗둥을 뚜겅으로 잘라내고, 속을 적당히 파낸 후 대추와 잣, 생강을 꿀과 함께 배 속에 채워 넣고 잘라냈던 배 윗둥을 닫고 실로 감아 찜기에 넣고 잘 쪄내면 완성. 지금도 몸살을 앓을때면 자동 반사처럼 엄마의 배숙이 마음에 떠오르곤 한다.
- 김경태, #43, 20241015.
아버지 기일에
국민학교 입학전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일곱살 무렵이다. 그 전에도 아마 한번쯤 한국에 돌아오셨던것 같은데 내가 너무 어릴때여서 그 이전의 만남은 기억에 없다. 엄마가 가끔 사진으로 보여주던 아버지가 집에 왔는데 낯설고 어색하기도 하고 신기하고 든든하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며칠동안 집에 계시면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선물도 많이 받아서 즐거웠는데 무엇보다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은 어느 날 노을 지는 저녁 무렵 자전거에 날 태우고 산책을 했던 기억이다. 자전거를 타고 도림천 뚝방길을 따라 신도림 인근의 어느 공장 부지까지 갔었는데 뚝방길 위에서 날 목마 태워서 공장을 보여주며 이제 곧 이 공장이 우리께 된다고 아빠가 곧 산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주시던 기억이 어린 시절 유일하게 아버지와 즐겁고 따뜻했던 기억이다.
아버지 나이 마흔넷에 내가 태어났고 내가 스물이 되기전까지는 아버지가 집에 거의 안 계셨고, 스물때부터는 자취를 시작하며 내가 집에 거의 없었어서 아버지와의 추억도 드물고 아버지에 대해 아는 바도 매우 단편적이다.
아버지는 아직 일제 치하에 있던 1935년에 서울에서 태어나셨다. 노량진 인근에서 자라셨다고 들었고 한국전쟁때는 끊어진 한강대교를 직접 보셨고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가 다시 돌아오셨다고 한다. 나이가 두 살만 더 많았어도 학도병으로 징집되셨을텐데 다행히 징집을 피해 살아남으셨다고 했다. 당시에는 부인이 여럿인 가정이 많았는데 할아버지 역시 그래서 아버지에게는 3명의 친형제 외에도 이복형제가 여럿 있었다고 한다. 일제 시대 유소년 시절을 보낸 아버지는 일본어를 잘하고 미 군정 시기에 영어도 틈틈히 익히셔서 3년간의 군 복무 후 제철소에서 일하게 되셨는데 그때 일본에 가서 기술도 익혀오고 경력을 인정 받아서 포항제철에서 일하시다가 7, 80년대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일때 십여년을 중동을 오가며 지내면서 목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그렇게 모은 돈으로 친한 친구 한명과 은행 대출을 보태어서 구로공단에 큰 공장을 인수하다가 친구가 아버지 돈과 은행 대출금까지 들고 해외로 도주하며 졸지에 빈털털이에 빚쟁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후로 2, 3년을 실의와 술에 빠져 지내시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시고 일본, 미국 등을 오가며 제철 기술자로 일하시다가 환갑이 지나시고서야 정년 은퇴를 하시면서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 집에 들어와 사시게 되었지만 그리고 그후로도 수년을 프리랜서로 더 일하시다가 칠순이 되어서야 완전히 일에서 은퇴하실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저학년일때는 한달에 두 세번 정도 집에 술에 취해 밤 늦게 들어오셔서 온 식구를 다 깨우고 온갖 트집을 잡아 폭력을 행사하던 기억, 고학년일때는 일년에 한번 정도 며칠 가량 집에서 쥐죽은 듯 잠만 자다가 다시 해외로 나가셨던 기억 밖에 없다. 그러다 내가 6학년때 괌이었던가 하와이이었던가로 3년간 주재원으로 아버지가 나가시게 되어서 마이클조단과 마이클잭슨 투 마이클에 미쳐있던 내가 엄마에게 나도 아버지랑 같이 나가고 싶다고 졸랐고 엄마가 조심히 나를 대려가면 어떠냐고 아버지께 이야기했지만 번거롭고 귀찮다며 단 칼에 거절하시곤 혼자 떠나셔서 3년을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그래서 중학생 시절엔 아버지를 본 기억이 전혀 없다. 중3때였나 고 1때 회사에서는 정년 은퇴를 하시고 집에 돌아오셨지만 그 후로도 프리랜서로 일하시면서 전국을 떠돌며 생활하시느라 고등학교 시절에도 설과 추석, 조부모님 기일외에는 얼굴을 뵌적이 없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 대학생활 내내 자취 생활을 하고 졸업하고는 바로 중국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해서 아버지와 한 집에서 제대로 같이 보낸 시간은 내가 중국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와 다시 국내에서 자취를 시작하기 전까지 3년의 시간이 유일하다.
모든 일에서 은퇴하고 날마다 산책하고 책을 읽고 집에서 소일거리를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겐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마치 겉 보기엔 똑같은 만두피에 쌓여있지만 매콤하다 못해 아플정도로 매웠던 고추로 속이 꽉차 있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밍숭밍숭한 야채로 듬성듬성 채워진 만두로 바뀐거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알던 아버지는 내가 못 보던 어느 해에 죽고 그 껍데기만 뒤집어 쓴 낯선 누구가와 같이 지내는 기분이랄까. 영혼이 바뀐듯한 아버지는 육체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군살 없던 몸 곳곳에 덕지 덕지 군살이 늘고 딱 벌어졌던 어깨는 오므라 들고 등이 구부정해지며 키도 점점 줄어드시고 어느 날부터는 지팡이 없이는 걷는 것도 힘들어 하시길래 걷는 걸 살펴보니 다리에 근육이 줄어들어 앙상해지시고 발 크기도 줄어들어 신던 신발마저 헐렁해 불편하고 계셨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는게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힘들었다. 내 안에 아버지와 현실의 아버지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컸다. 그래서 일곱살 아버지를 처음 봤던 마음으로 아버지를 다시 각인해보았다. 그렇게 내 나이 삼십이 되어서야 아버지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내 인생에 들어오니 그동안 부러워만 했던 것들을 하고 싶어졌다. 한번도 해본적 없는 부모님과 같이 외식도 하고, 영화도 보고, 놀이동산에도 모시고 가고, 여행도 가고, 부모님과 형제들을 다 모아 놓고 가족 사진도 찍어보았다.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소년 시절 추억으로 남아 있을법한 일들을 서둘러 해보았지만 아버지의 정신은 그 시간에도 육체와 함께 빠르게 무너져 가고 있었기에 딱 삼년이 한계였던 것 같다. 어느 날부턴가 때 쓰는 일이 많아지고, 집중력을 잃고 산만해지고, 혼자서는 거동도 힘들어지고, 대소변을 못 가리게 되고 아버지는 그렇게 다시 아이가 되어갔다. 그렇게 아버지는 가장에서 막내가 되고 막내였던 나는 우리집의 가장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사회 생활을 시작해야 어른이 된다고 하고, 누군가는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부모가 되어봐야 어른이 된다고 하는데 다 맞는 말이지만 좀 더 한 발 더 나아간 어른이 되려면 내 부모의 기저귀를 갈아보고 장례까지 치루고 나서야 정말 어른이 되는게 아닐까 싶다. 내 아이의 기저귀를 가는 일은 웃으면서 하게 되는데 내 부모의 기저귀를 가는 일은 슬프기만 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2년 전 엄마가 먼저 돌아가셨고 엄마가 돌아가신 그 가을과 겨울을 지나 이듬해 봄에 간단한 종아리 혈전 제거 시술을 위해 하루 입원했던 아버지는 시술 후 처치가 잘 못 되어 의식을 못 찾고 일년을 병원 생활을 하다가 집에 모셔와 이듬해 가을까지 침상에서 지내시다 엄마가 돌아가신 것처럼 10월 어느 날 조용히 주무시다가 숨을 거두셨다. 아버지는 참 그 삶의 마무리까지도 우리 집의 아픈 손가락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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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하지 못한 아버지라는 존재와 그 역할을 난 잘 할수 있을까, 잘하고 있는 걸까 늘 고민이 되었고 고민이 된다. 실수를 하고 있진 않은지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진 않을지, 내 존재가 아이의 인생에 마이너스한 존재일지 많은 고민과 염려가 늘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또 한편으론 다 지나가고 보니 아버지가 내 인생에 부재했던 삼십년 역시 아버지의 그런 고민의 시간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 아이가 삼십이 되었을때 나를 어떻께 추억할까, 그저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든든해질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김경태, #44, 2024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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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잘 지내세요?
아빠 잘 지내고 계세요? 믿음으로! 천국은 이 땅보다 정말 좋은 곳이지만, 아직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니까 아빠 어찌 지내시는 지 궁금해요. 잘 지내시고 계시죠? 아빠, 특히 엄마랑 아빠 좋아하시던 거 먹을 때, 어디 멋진 경치 볼 때 우리끼리만 먹고 즐겨서 미안해요. 안 미안해도 되는데 그냥 그 마음 먼저 들어요. 실은 아빠는 엄청 좋게지내실건데 웃기죠?
아빠, 그래도 오늘 하루를 보내고 방에 와서는 또 울어요. 아빠 보고싶으니까 울죠. 아빠가 이 땅에서 예수님 믿으신 게 전부를 살아내신것인데도, 그죠. 다 헛된건데. 저는 아빠가 이 헛된 세상에서 너무 빨리 고생만 심하게 하신 거 같아서, 그래서 빨리 천국 가셨나 해요. 그리고 또 울어요. 여름이 길어져서 아빠 나무가 곳곳에 오래 꽃을 피우거든요. 그 꽃을 오래 볼 수 있어서 좋은 게 아닌데, 아빠 나무가 서울에도 많아져서 좋더라고요. 아빠를 더 생각나게 해줘서.
아빠, 저 잘 살고 있어요. 뭐 남이랑 비교하면 못 사는 건데요, 비교해도 사람 사는 건 다 헛된 그런거니까 잘 살고 있다고 말씀 드릴게요. 아빠에게 배운대로 저 나름 일 성실하게 하고 있고, 엄마랑 화목하고, 좀 심심하지만 회사-집-교회 오가며 가끔 놀기도 하고 그래요. 아빠가 회사원이라 좋겠다고 하셨던 거처럼 연차도 쓰고, 아직 월급이 나오고 있어서 감사하고 있어요. 괜찮은거 맞죠? 아빠, 어쩌면 아빠가 수목장을 시골에 하라고 하셔서 다행이에요. 안그럼 가까운 곳에 했다면, 때마다 저는 아마 더 울고 울고 울었을 거 같거든요. 지금은 힘들 때 하늘만 보니까 정말 보통의 삶을 사는 거 같아요. 그래도 시월이 되면 우울하지만, 아빠가 여전히 오래 집에 안들어오시는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ㅡ또 먼저 잘게요. 하면서 뚝 그치고 잘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아빠, 미안해요. 아빠가 선생님하라고 했는데 공부 열심히 안해서 미안해. 방탕하게 친구랑 논다고, 아빠가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할 때 그럴 걸. 택배 그만 시키라고 할 때 그럴 걸. 아빠 얘기를 더 자세히 들을 걸. 아빠가 더 멋진 말들을 했을 텐데 미안해, 잘 기억이 안나. 아빠, 아빠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더 빨리 알 걸. 아빠 미안해. 아빠 너무 보고싶어요. 아빠, 엄마도 버티고 살고 있는데 티내서 미안해.
- 박경선, #38, 20241020.
국물의 depth를 찾아서
오늘 저녁 메뉴는 된장찌개다. 내가 만들었지만 솔직히 너무 맛있다. 마음 속에서 ‘요리 잘하는 사람 너무 멋있는데 그건 바로 나인것 같다’ 라며 자아도취에 빠진다. 그렇다 나는 혼자 놀기의 달인이다.
나는 오늘 찌개에 대해 얘기하려했다. 내가 끓인 찌개에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판 된장을 사용해서인지 국물의 감칠 맛이 덜 한 것 같다는 것이다. 이퍼센트의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육수에 멸치 다싯물을 내었어야했나..다시마를 넣었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찌개를 끓이는 동안 나는 마치 마님이 머슴에게 차려주던 고봉밥 정도의 밥을 떠왔고 찌개와 함께 맛있게도 먹었다. 역시 한국인의 밥상에는 국물이 있어야..........라고 글을 쓰는 중에 나에게서 아저씨와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것 같다. 푸핫. 아무튼, 욕심쟁이인 나는 더 완벽한 찌개를 끓이기 위해 엄마께 국물의 감칠맛에 대한 나의 고찰을 의논 해보려 한다.
보아하니 고작 찌개 끓이는 법 하나에도 요란인 나는 참 싱거운 사람이다. 문득 사람의 깊이에 대해서도 이렇듯 찌개를 끓이는 것 처럼 레시피가 있는 걸까 궁금하다.
몸 뿐 만 아닌 마음 속 어딘가까지 든든하고 기분 좋은 저녁이다.
- 강하람, #13, 20241021.
보통의 나날들의 기록
말도 안된다. 진성 페이블러였던 내가, 눈 떠 보니 아무 것도 적지 않은 나날들을 보내왔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말이 참 된다. 사람은 이렇게 살다가 저렇게도 사니 말이다.
1.5살이 된 사랑스러운 조카를 보고 온 날이 있었고, 나는 사랑스러움에 눈을 못떼고 미소 짓기 그만두기에 실패해,
아주 팔자주름 더 깊어졌으며,
6K쯤은 이제 껌이라 즐거웁게도 달렸으며,
새로운 관계를 시작해보기도 했으며, 그것이 일상에 큰 부분 차지하도록 가만 놔둬보기로 하기도 했다.
나랑 똑 닮은 사람이 있다.
장기하는, 장기하와 얼굴들 밴드로 노래하던 시절
‘내가 ㅏ 하면 ㅏ 하는, ㅓ하면 ㅓ 하는 사람이 있었더랬어요’ 라고 노래하기도 했는데,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ㅏ 하면 ㅓ 하는 것이 쿵짝일 때는 사랑으로,
ㅏ 했는데 왜 ㅓ 하냐 하는 다툼일 때는 미움으로,
같은 말이 다른 마음으로 해석될 때가 오려나.
굳이 애써서 그 때를 두려워할 필욘 없겠지만,
그리고 그 때가 올거라서 지금의 쿵짝에 진심을 다하지 않을 필요는 없을테다.
진심 다해 살아가다 살아가다 보면, 그냥 또 살아가고 있을테다.
살아감과 호흡함만큼이나 충분히도 아름답고 의미로운게 또 어딨나 싶다.
- 안경준, #39, 20241022.
무슨 재미로 살어?
“무슨 재미로 살어?”
어쩌다 듣는 질문이다. 개인적인 관심과 걱정이려니 하다가도 뜬금 없고 어이 없는 감정이 들때가 있다.
얼마전에도 그랬다. 그저 자기 기분에 취해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뜬금포가 날라 왔다. 그 폭탄에 어!어? 하며 아무말 못하고 피 흘리는 나를 보고 말았다.
대학시절 교육심리학 시간이었던가?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들의 특징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거라고 했었는데... 이 사람은 그 이론에는 분명 따라 가는 사람인가 보다.
그럼 난? 이 찝찝한 기분은?
그래. 너 나보다 나은 사람 되시기를 . ㅍㅎ
- 이현주, #16, 20241023.
특새 기간
택시를 잘 타지 않지만, 특새에는 택시를 탈 수 밖에 없다. 새벽 4시쯤 일어나서 대충 준비를 하고 택시를 타고 20분쯤 가면 교회다. 이미 자리는 거의 차서 겨우 본 당에 들어갈 수 있다. 추운 새벽공기를 맞으며 나온 교회는 따듯한 히터 바람과 사람들의 온기로 찬양을 하다보면 덥기까지 하다. 빠른찬양 실로암을 꼭 부르게 되고, 박수를 치고, 느린찬양 손을 들고 눈을 감으며 부르게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주여! 외치면 불이 잠시 꺼지고 통성으로 모두 함께 소리쳐 주님을 부르고 또 부른다. 임재하시는 그분을 느끼며 대표기도자가 나와 잔잔히 기도를 한다. 불이 켜지고 담임목사님이 “사랑합니다” 인사하면, 옆 자리 사람들과 목례를 하면서 사랑한다고 인사한다. 교회에서는 사랑한다는 인사가 참 쉽다. 사랑한다는 흔한 말 때문에 상처받을 일은 없다, 특새니까.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노트에 받아적는다. 말씀 구절구절 풀어주시는 내용, 그 안에서 주시는 도전을 적는다. 눈물이 난다. 구원-말씀에 순종-기쁨과 감사, 그리고 도전과 삶의 미래와 희망이 되시는 하나님, 이 새벽에 내가 찬양 하리라. 다시 담임 목사님의 선포와 함께 찬양을 부르고 주여! 6시 15분쯤이 되면 불이 살짝 켜지고, 담임목사님이 말씀하신다. 계속 기도를 이어가십시오, 그러나 출근하는 성도를 위해 자리 끝에 앉은 성도들은 기도를 잠깐만 쉬어가십시오.
자리를 이동하는 소리가 들리고, 기도를 이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3층으로 내려와 아침밥을 먹는다. 순대를 썰고 있는, 모닝빵을 굽는, 커피를 내려주는, 오뎅국을 퍼주는, 김밥을 써는, 씨리얼에 우유를 말아주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는 목사님들을 지나 자리를 맞는다. 이제 목사님들이 그렇게 섬겨주시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 많은 성도들이 이 작은 식당에 앉아서 후루룩, 후후, 꿀떡꿀떡 먹는다. 즐거워하며, 맛있다. 어느새 교구 목사님이 다가와서 인사해주신다. 식당 한 쪽에서는 교구끼리 모여서 먹고, 함께 기도하고 응원한다, 오늘도 잘 살자. 2층에 내려오면 바로 가지고 가 먹을 수 있도록 샌드위치와 커피 그리고 주스를 주신다. 3층에서 든든히 먹고 내려와 이제 날도 밝아졌고, 버스도 다니니까 길을 건너 정거장에 선다. 너무 졸리지만 영혼과 뱃속을 채웠으니, 보람찬 하루를 살아보기로 한다.
재택을 할 수 있어 감사제목이 하나 더 추가된 특새기간에 오늘까지 한 번도 가지 않았지만, 내일 하루 남았지만, 갈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제발 일어나 갈 수 있기를!
- 박경선, #39, 20241025.
내 엄마
아빠는 아빠라고 부르기보다 아버지라고 부르는게 입에 붙는데 엄마는 어머니라고 부르는게 너무 낯설다. 엄마의 팔십 생애에서 내가 태어난 이후의 40년이 그래도 내가 태어나기전의 40년 인생보다는 덜 불행했다는 사실이 나에게 위안이 되는 것처럼 엄마에게도 그랬었기를 분명 그랬다고 생각한다.
1939년에 태어난 엄마의 유소년기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가장 암울하고 비극적이고 힘들었던 시기와 맞물려 살기위한 몸부림으로 기억된다고 하셨다. 평양에서 자란 엄마는 한국전쟁의 참상과 공산당의 만행을 두눈으로 직접 목격하며 피난길 폭격에 가족들이 죽고 삼팔선을 넘어 오는 과정에서는 국군에게 농락당하고 전 재산을 몰수 당하고 간신히 살아 남은 식구들과 상암동에 자리를 잡으셨다. 외할아버지는 그 이후 얼마 안지나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는 쌍둥이인 두분의 외삼촌에게 모든 걸 걸고 뒷바라지를 하셨는데 엄마 역시 공부는 꿈도 못 꾸고 십대때부터 공장에 취직해 그저 밥 먹고 살기 위해 두 오빠의 뒷 바라지를 위해 일하고 집안 살림도 도맡아 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쌍둥이 외삼촌은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고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하고 승승장구해서 외가를 다시 일으켜세울수 있었다. 그렇게 십년 넘게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하다가 두 오빠에게 바톤 터치를 하고 20대 중반에 중매로 만난 아버지와 결혼을 하게되었다고 한다.
빈털털이로 간신히 노량진에 사글세 방을 얻어서 시작한 결혼 생활은 빈곤하고 고단했지만 언젠가 내집을 장만하리라는 희망을 갖고 성실과 근면, 악과 깡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한푼씩 어렵게 돈을 모으며 지나오셨다고 한다. 결혼한 이듬해에 바로 첫 자식을 갖게 되었고 이어서 2, 3년 터울로 둘째, 셋째, 넷째까지 가지게 되셨는데 넷째가 아직 뱃속에 있을때 급성 페렴에 걸린 첫째를 돈이 없어서 제때 큰 병원에서 치료를 못 받게 되어서 결국 하늘로 돌려보내고 가슴에 묻게 되셨다. 이때 백방으로 돈을 빌리러 다니셨는데 기독교 신자가 된 딸을 내놓은 자식 취급하던 외가에서는 엄마를 외면했고, 아버지 형제들에게는 얼마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때마침 사업 실패로 어려워하던 작은아버지한테는 한 푼 도움을 못받았는데 그 이유로 십년 가까이 외가와 작은아버지네와는 왕래가 끊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더 낳지 않고 네명의 자녀만 잘 키우자 했는데 뜻하지 않게 첫째를 잃게 되어 엄마 나이 마흔에 첫째 형 대신 나은게 나라고 한다. 내 태몽으로 돼지 꿈을 꿨는데 그 덕분인지 날 임신하고는 집안 경제가 좋아져서 내가 태어나던 해에 드디어 지금의 신림동 본가 단독주택을 매입해서 내집 장만의 꿈을 이루시게 되었다. 내 위로 형제들은 갖난 아기때 엄마가 너무 굶어서 젖이 안나와 젖도 잘 먹이지 못하고 유아시기에도 하루 한 끼 간신히 먹고 배고플때 많았다고 하는데 난 젖도 잘 먹고 한번 배 굶는 일 없이 잘 먹고 자라났다고 한다.
그렇게 쭉 더 부유해지고 행복해질것만 같았는데 내가 열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큰 사기를 당해 큰 빛을 지게 되면서 엄마의 행복도 딱 십년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는 좌절이란 모르는 사람처럼 한번도 전업 주부였던 적이 없는 사람처럼 아버지가 실의와 술에 빠져 허우적 거릴때 바로 투잡, 쓰리잡으로 일을 시작하고 미친듯이 빛을 갚아나가셨다. 그렇게 십년을 일하고 나서야 쉬실수 있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네명의 자식은 늘 사건 사고를 일으키며 엄마를 힘들게 했다. 몸도 마음도 병약했던 누나는 자주 병원에 입원하고 사이비 종교에 빠지기도 했으며 큰형은 아버지에게 일찍히 실망해 인연을 끊듯 살아갔고 작은형은 늘 싸우고 사고를 치고 다녀서 뒷 수습을 하느라 엄마의 등골이 남아나지 않았고 6학년때 당한 교통사고로 막내 아들인 나 역시 학교보다 병원 대려가야 하는 날이 더 많았는데 아버지는 늘 상 집에 없어서 엄마는 혼자 이 모든 걸 감당해야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막내인 나까지 대학을 보내고 이제 한 시름 놓고 지내게 되나 싶었지만 그 이후로도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은 엄마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가장 먼저 독립했던 누나는 지병때문에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이어 나가지 못했고 그 반대 급부로 지나치게 종교에 몰입하며 제대로 남자를 사귀지 못했고 결국은 나이 마흔에 백수가 되어 다시 본가 집으로 들어와 엄마에게 용돈을 받으며 집안 살림을 축내며 살게 되었다. 큰 형은 누나 다음으로 독립해 나가서는 일년에 두번 설과 추석 당일에만 찾아오고 연락도 안하고 지냈는데 첫 직장 생활과 자취 생활에 취해 카드 결재를 남발하다가 결국 감당치 못할 빛을 갖게 되어서 엄마는 결국 대부분의 투자금을 회수해 빛을 갚아주어야 했다. 작은 형도 큰 형에 이어서 동일한 문제로 엄마를 힘들게 했고 그렇게 엄마의 노후 자금은 바닥이 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은퇴해서 종일 집에서 지내게 된 아버지는 몇 년 사이에 훌쩍 늙고 치매가 빠르게 진행되어서 엄마의 치매 역시 심해지기 전 몇 해는 엄마가 아버지를 돌보느라 고생이 많으셨었다.
건강하시던 엄마는 내 결혼식이 있기 두 달 전 겨울 어느 날 새벽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가 뇌출혈로 교회 앞에서 쓰러졌는데 다행히 교인들이 바로 발견해서 교회 바로 앞 보라매병원에 가서 적절한 처치를 받아서 회복되고 결혼식 날에는 무사히 참석하실 수 있었는데 그 때부터 말도 조금 어눌해지시고 걸음도 부자연스러워 지셨고 첫 손주를 보게 된 그 이듬해부터 치매 증상이 본격적으로 생활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결국 아들이 네 살되던 해 난 육아휴직을 일년 동안 하게되었다. 일년 동안 1월 2일부터 12월 31일까지 매일의 내 일과는 새벽에 영어 학원에 갔다가 아들 아침 챙겨주고 등원 시킨 후 바로 신림동 본가에 가서 4시까지 아버지는 요양원에 보내고 엄마는 집에서 내가 직접 챙겨드렸다. 그리고 누나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딸 수있게 학원을 알아봐주고 수강료도 내주었다. 엄마가 관리하던 통장과 자산들도 다 넘겨받고 법정대리인이 되어서 세금 처리와 집안일도 도맡아서 정리했다. 고작 일년이었는데도 쉽지 않았는데 평생을 이렇게 집안을 챙겨오신 엄마의 노고에 참 많이 울고 또 울었던 것 같다. 더 많이 모시고 다니면서 좋은 데 많이 가고 좋은 음식들도 챙겨드리고 손주와 사진도 많이 찍어드릴걸 하고 후회도 많이 되었다. 아이들은 이제 기저귀를 때고 펜티를 입고 생활하게 육아하고 있는데 부모님은 팬티 대신에 기저귀가 익숙해지도록 돕고 있는 현실이 픽션 같기도 했다.
그렇게 일년을 그래도 매일 모실 수 있어서 엄마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많이 내려 놓을 수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 이듬해 가을에 돌아가시고 나니 더 못해 드린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만 한 가득 남아 그때의 마음이 참 안일하고 바보 같았다고 자책이 많이 되었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일년을 보내고 난 이듬 해 가을 팔순 생일이었던 토요일 저녁 식사가 엄마와 함께 한 마지막 만찬이 되었다. 엄마는 이틀 뒤 월요일 새벽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가 두번째 뇌출혈로 쓰러지시고 중환자실에서 의식없이 십팔일을 보내고 6년전 오늘 그대로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중환자실에서 보름이 넘어가자 담당의가 연명 치료를 그만두는게 어떻겠냐고 물었었고 형제들이 모여서 회복 가능성, 병원비 등을 두고 한참을 고민하고 그래도 며칠 더 고민해보자고 하고 이야기 나눴었는데 자식들이 더 고민할 필요 없다는 듯 딱 그런 시기에 엄마는 돌아가셨다. 퇴근해서 마침 병원에 가던 길이라 내가 가장 먼저 중환자실에 도착했는데 엄마의 얼굴이 얼마나 평온하던지 다른 형제가 오기전까지 한참을 멍하게 엄마 손을 잡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게 기억 난다. 돌아가신 모습조차 자식들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모든 삶을 자식에게 헌신하시고 마지막 돌아가실때까지도 자식을 챙기듯 돌아 가신 엄마. 그 모든게 너무 현실같지 않아서 그랬는지 이상하게도 그 날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장례를 진행하는 동안 어디로 모실지를 정하고 준비해야해서 형제들과 이런저런 방법들을 이야기 나눴는데 처음엔 수목장으로 사설 수목장터에 가족 나무를 정해서 이후에도 다 그곳으로 안장하자고 했다가 엄마가 생전에 나무보다는 잔디와 꽃밭에 안장되고 외할머니 가까운곳으로 가고 싶어했던게 떠올라서 결국은 외할머니가 모셔진 서울시립묘지로 모시게 되었다. 서울시립묘지는 위치를 지정할수 없고 오는 순서대로 화장하고 유골을 안장하게 되는데 수많은 산에 걸쳐 조성되어 있는 광활한 공간이다보니 어디로 안장하게 될지 알 수가 없었는데 놀랍게도 바로 외할머니 근방에 있는 묘역이 배정이 되어서 함께 왔던 친척과 교회 분들 모두가 많이 놀라고 슬픈 와중에도 감사했던 기억이 난다. 신기한건 두 해 뒤에 아버지도 똑같이 서울시립묘지로 모셨는데 엄마를 모신곳에서 채 수십미터 떨어진 가까운곳에 모시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평생을 기도하며 살아오신 엄마가 하늘에 가셔서도 자식들 고생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이야기 드린게 아닐까 싶었다. 덕분에 명절이나 기일에 엄마 장지 가까운 곳에 주차 하고는 힘들지 않게 세 분을 모두 보고 올 수 있어서 늘 감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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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살아 생전 날 많이 안아주거나 사랑한다고 말해주거나 한적은 극히 드물다. 내가 원하는만큼 내가 먹고 입고 갖고 싶은 걸 챙겨주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엄마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날 챙기고 줄 수 있는 만큼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었음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진정한 사랑임을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사랑이 무언지 가르쳐주셨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는 도무지 자신이 없지만 그저 하루 하루를 노력하며 엄마의 모습을 그리며 따라가보려 한다.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엄마. 당신의 자식으로 살던 엄마의 우산이 있던 그 시절이 얼마나 행복한 시절이었는지 사랑 받고 있었던 건지 지나고서야 아는 바보 같은 아들이 당신의 삶으로 알게 해준 사랑을 이어받아 엄마 손주에게 잘 전해지도록 살아가볼게요. 하늘에서 지켜봐주세요.
- 김경태, #45, 202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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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이십칠일
개탄스러워.
참담해.
변태같아.
- 안경준, #40, 20241029.
다른 말로 바꾼다면
길지도 않았던 손톱이 깨끗이 정리된 것을,
있지도 않았던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있는 것을,
알아차린 바로 그것.
- 안경준, #41, 20241029.
출근
죽겠다. 우리나라에 이렇게나 사람이 많았나 지옥ㅊ 아니 지하철의 문이 열린다.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을 향해 되게 친한 사이인양 밀착하여 대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나의 소중한 엉덩이와 작을지언정 붙어있는 가슴이 타인에게 닿을까 최대한 몸을 움츠린다.
여기 계신 사람들과 살이 닿자 사람들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이겠거니..생각한다.
그래 참자, 몇십분만..인생은 원래 기다림이 거의 전부라 했다.
이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며 눈 꼭 감고 재미난 상상을 한다. (♪)
- 강하람, #14, 20241031.
사분기(四分期) 그리고 사분기(死分岐)
누구에게나 매년 되돌아오는 계절의 상처가 있다.
나에게는 이 계절이 그렇다.
10월부터 시작되는 사분기는 나에게 또다른 의미의 사분기이기도 하다.
내 인생의 가장 힘들고 고단하고 죽음과 가까웠고 죽음이 있었던 돌아보고 싶지 않고 기억의 저편으로 던져버리고 가장 깊은 곳에 봉인된 모든 어두운 경험들이 대부분 사분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을이 있어서 사람들에게는 가을 타는 걸로 보여서 다행이지만 이 계절이 돌아오면 난 사분기를 탄다. 마음의 심연 어딘가에서부터 퍼져오는 진동이 나에게 멀미를 유발한다. 항시 메슥거리고 피곤하고 산만하고 머리가 아프고 과민하고 감정의 파고가 높아지고 화도 눈물도 많아진다. 이런 나를 진정시키는데 거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 그래서 더 말수도 줄어들고 행동도 조심하고 더 많이 혼자 있으려고 하고 무의미한 것들을 하며 생각할 틈을 스스로에게 안 주고 이 계절이 그저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하루하루를 덧 없이 흘려보낸다.
그 하나하나의 지점속에 분기된 시간들이 흘러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거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최초의 지점으로 돌아가 더이상의 분기가 일어나지 않게 했었다면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선택이 있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런 선택을 했다면 하고 생각이 시작되면 화산이 터지면 마그마를 다 뿜어내고서야 식을 수 있듯이 멈출수 없게 되니까 아에 쉴틈없이 스스로를 소모시키는 선택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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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담기는 건 알록달록 단풍 들고 낙엽이 물들어가는 가을인데 감긴 눈안에 담겨있는 건 어떤 색이라고도 형용할 수 없는 세상 가장 더러운 구정물이 온 마음을 물들어가는 계절이라 더 쉴세 없이 하늘을, 나무를, 단풍과 낙엽을, 가을속에서 나와서 가을속으로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두 눈에 카메라에 자꾸만 더더더 담는다. 감긴 눈에 밀리지 않도록 현실까지 흘러나오지 않도록 가을색으로 방벽을 쌓아올린다.
그 모든 경험들도 시간의 흐름속에 지나갔듯이 올해의 사분기도 벌써 한달이 흐르고 남은 두달도 곧 지나가리라. 지나가리라. 더이상 누적됨 없이 지나가고 어서 새해가 밝아오길. 오색의 계절과 순백으로 덮힌 계절을 지나 어서 빨리 새롭게 채워야 할 캔버스를 받아 볼 수 있기를. 세상이라는 어항에 갖혀 일년마다 리셋되는 금붕어라 할지라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래본다.
- 김경태, #46, 20241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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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10월은 어땠나요?
몸살로 포문을 연 저의 10월은 바람 잘 날 없이 험난했지만 날마다 바뀌어 가는 하늘과 나무와 바람을 느끼고 두 눈에 카메라에 담으며 정신 없이 지나간 것 같아요😊
아쉽게도 '일자영활'은 참석자도 없고 저 역시 다리를 다쳐서 제대로 진행을 못했지만 그래도 강원도에서 혼자였지만 계절을 태우며 물들어가는 가을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어서 좋았답니다. 🍁🍂😊👍
지금 뉴스레터를 읽고 있는 페이블러 누구나 언제나 '일자영활'의 호스트가 되실 수 있으세요~!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주위 사람들에게 나만의 지식과 감성을 나누며 일상속에서 더 많이 도전하고 행복을 쌓아가는 님의 계절이길 소망합니다🧡
42주 챌린지에는 다섯분의 작가분들이 참여해 19개의 문장들이 더 채워졌습니다. 이제 11월 딱 한 달이 남았는데 마지막까지 저마다의 색깔이 even하게 담긴 글을 늦가을 낭만하게 함께 depth 있게 물들일 FABLE 기대해주세요~🤩
님~!
'42주 챌린지' 계속 관심 가져주시고 구독 끊지마시고 '일자영활'에도 일정되시면 같이 체험하며 2024년 끝까지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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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마지막 '일자영활'은 캠프파이어 입니다~🔥
일단 11월 마지막 금요일로 예정해보아요~!
늦가을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일자영활'에 님을 초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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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미정(강화도 or 고창)
🕙스케쥴:
11월 29일(금) 하루 또는 30(토)까지 1박 2일
강화도로 가게 되면 당일 치기로 고창으로 가게되면 1박 2일 예정
관심 있으신 분들은 위 링크의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문의주세요~😁
📷준비물:
따뜻한 복장, 촉촉한 눈과 감성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일자영활'은 누구나 각자 호스트가 되어 개별의 주제와 일정으로 진행하실 수 있습니다. 님만의 일상에 자극과 영감을 주는 찾아서 혼자 하셔도 되고, 함께하고 싶은 활동은 언제나 공유하고 초대해서 모두와 함께 하셔도 됩니다. 일자영활에 대한 공지는 지금은 제가 호스트인 활동만 뉴스레터에 담고 있는데 미리 말씀해주시면 뉴스레터에 내용을 담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자영활의 게스트는 활동작가가 아닌 구독자분들도 참석 가능하고 지인분과도 같이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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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소리함을 클릭해
어느 글이 좋았는지
어느 작가를 응원하고 싶은지
아쉬웠던 점
읽으며 들었던 생각
편하게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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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ble>은 맴버들과 연간 다양한 활동과 글쓰기 '42주 챌린지'(2월 부터 11월까지 매주 한 줄이든 한 문장이든, 이야기 한 편이든 자유롭게)를 함께 하며 페이지를 채워나가고 연말에는 글과 활동 사진을 엮어 한 권의 책을 완성하려고 합니다.
님의 일상에도 한 방울의 영감을 더해주는 <Fab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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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BLE>
발행인 : 옆집오빠
편집부 : 허작가님, 안경
활동작가 : 강하람, 김경태, 박경선, 안경준, 이현주
kyeongtae_kim@worldvision.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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