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이젠 정말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나라도 장마가 아닌 우기라고🌧☂🌡
이 계절에 딱 듣기 좋은 플리와 함께
여섯번째 'Fable' 을 전해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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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같은 이미지를 바라보더라도 서로 다른 시선으로 다른 감성으로 다른 이해로 서로를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는게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일상 소식으로 시작하던 여는 글을 누군가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시선 코너로 바꿔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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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윤경, 비 오기 전? or 비 온 후?, 20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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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Book Curation은 '짱고아빠', '짱고책방', 글도 사진도 트렌드도 놓치지 않는 월비의 탑지성 민혁님이 소개하는 황보름의 에세이 '단순 생활자'입니다. 아래 링크 타고 '짱고책방' 인스타그램, 블로그, 브런치도 살펴보시고 감성 충전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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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아 책방이었다. 잘 큐레이션 된 책방의 책들은 전부 다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흡입력이 셌고, 그 자리에서 한 권씩 펴보다 결국 모조리 사진 찍어 리스트 만들어 두고는 한 권씩 읽어 내려가는 중이다. 그중 제일 먼저 꺼내든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단 단순 생활자. 펴들고 알았다. 이 책이 그 유명한 <어서 오세요 휴남동서점입니다> 작가가 쓴 그 이후의 에세이라는 걸.
글잘잘이라는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소설이든 에세이든 아무 글이나 써도 좋다. 읽기 편하고 문단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가 퇴사 이후 전업작가의 삶을 시작하고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을 돌보며 삶의 구석구석을 재점검하는 에세이의 모든 부분이 좋다. 뭐랄까 내가 꿈꾸던 혹은 내게 필요한 삶이 거기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답도 없는 질문을 가끔 할 때가 있다. 먹여살릴 가족이 있다면 내 식구 입에 밥 숟가락 들어가는 게 행복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느즈막히 일어나 자신을 빤히 바라봐 주는 댕댕이 혹은 냥냥이를 꼭 끌어안고 갓 내린 커피향과 함께 딩굴거리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죽을 것 같이 뛰고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이 행복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다들 느끼는 행복의 조건이 다를진대 내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생각이 책을 읽는 동안 떠나지 않았다. 나 행복할까?
"다른 건 다 망친 하루라도 김치볶음밥 하나 맛깔나게 잘 만들어 먹었다면 그날은 뭐라도 하나 한 거"라는 작가의 이야기에, 그 작은 자기와의 약속을 하나하나 지키며 하루를 가꾸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하지 않고 해야 할 것들을 해나가는 성실한 삶에 괜히 나의 오늘을 돌아보았다. 정신 없이 바쁘기만 했던 나의 하루. 어쩌면 모든 것을 하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을 놓아버린 삶을 아니었을까.
돌이켜 보면 00을 하지 못해서 망한 것처럼 느껴지는 하루가 꽤 많았다. 사실 영어 공부, 운동, 청소 같은 거 하루쯤 안 해도 내 삶의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오늘 해야 할 출근을 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나 없어도 잘 돌아간다. 나만 인정하지 못할 뿐. 남들이 다 하는 것들 나 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충실한 하루를 쌓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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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 생활자'는 월비책방에는 아직 입고 전이라 작가님의 5분 북콘서트 영상을 첨부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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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주 챌린지(22th week~25th wee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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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작가별로 읽을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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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아니까
"어차피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아니까 하고 싶은 걸 다 해요." by 이하민
by 이하민을 꼭 달아달라고 하셨다.
올해 6월은 정말 너무나 힘이 든다.
원래도 오르락 내리락 하며 사는 인생이었지만,
6월은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뭔가 버겁고 힘이 드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계속 힘든 내 모습을 내비치는 것이 짜증이 나고,
도대체 올라오지 않는 이 컨디션에 짜증이 나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 화가 나고,
사춘기도 이런 사춘기가 없다.
늦게 온 사춘기인지 일찍 온 갱년기인지 모르겠다.
내가 즐거워하는 것들을 스스로 충분히도 안다고 생각해왔으나
이런 무력함 앞에서는 모든 게 다 소용이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나를 도무지 모르겠는 어떤 시간을 지나면서
몸이 무겁고 생각과 마음이 거칠어지고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인사하지만 내 안과 밖에 평화가 도무지도 없는
이 얼척 없는 상황.
모든 게 재미가 없는 상황.
그런 중에 꽂히는 한 마디가 있으니,
위의 말이다.
그래, 나는 원래의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던 나 로 돌아갈테니,
지금은 지금 하고 싶은 걸 해보자.
근데 그런건 또 없지.
결국, 화이트 초코 케익 한 판을 먹어 치우는 것만 해냈다.
- 안경준, #24, 20240630.
할머니s
인생의 노잼시기를 지나가며, 어떤 자극도 자극 같지도 않고 재미가 없던 요즘,
삶의 의미도, 재미도, 정말 아무것도 없던 요즘
할머니 세 분이 나를 조금 깨운다.
해외아동후원 3만원은 부담이 된다며 1만원으로 줄여달라고 전화를 해 오신 할머니 후원자님과의 통화에
인생의 여유와 연민과 해학을 느낀 탓에,
사무실을 찾아오신 직접 현금으로 후원을 하시겠다고 하는
두 분의 할머니 덕에,
그리고 이 분들과의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대화들 덕에,
나는 조금 깨어났다.
쭈굴쭈굴한 얼굴에, 묻어나오는 웃음에,
대화 사이 사이 흐르는 잠깐의 적막에,
그것은 노화가 가져다준 인생의 여백이기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그들과의 대화가
나는 참으로 좋았던 것이다.
- 안경준, #25, 20240630.
기억, 부탁받은 일
기억의 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많은 일들에, 특별히는 공동체적 아픔이 녹아 있는 지나간 일들에,
흔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말 입니다.
기억하겠다는 말, 잊지 않겠다는 말.
개인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적극적인 행위로
'기억'은 자주 우리 앞에 소환됩니다.
그렇다면 왜 기억해야할까에 대한 질문이 따라옵니다.
그러면 여러 답변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기억은 힘이 있기 때문에,
여전한 현실 속에서 기억만큼은 계속해서 유지 될 수 있는 무엇 이기에 등등.
그러나 최근 제가 들은 답변 중에 이 답변에 가장 큰 답이 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억' 이야말로, 우리의 기억이 필요한 이들이
우리에게 부탁한 것 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필요를 채워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계속해서 기억해달라는 그들의 부탁때문에,
우리는 부탁 받은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마음으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벌써, 계속해서 이 기억을 이어온 의지의 유산들이겠습니다.
함께 기억해 가야겠습니다.
- 안경준, #26, 20240630.
변해가는 것들, 그대로인 것들, 돌아온 것들
우리집은 20년째 101동 808호입니다.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 앞에는
자매문구와 중앙문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자매문구만 남아있습니다.
저는 6학년 5반으로 졸업했는데
지금은 학년에 한 개 반만 있다고 해요.
골목길 사이사이 집들이 철거되어 있습니다.
높은 아파트가 올라오기도 했구요,
시내라 불리던 곳엔
더이상 사람이 없습니다.
아파트 입구를 지키는 나무는
제가 이 곳에 살 때부터도 컸으니
아마 훨씬 오래 여기 있었을텝니다.
(저는 ‘텝니다’ 라는 말을 자주 쓰네요.)
아이들의 등하교길 웃음소리를
다 받아내던 나무는
이제 어떤 소리들을 받아내고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사실 저희 아파트는 되게 오래돼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없어요.
어쩌면 나무는 이제 고요함 속에서,
그 고요함을 받아누리고 있을수도 있겠습니다.
바지통은 넓었다 좁아졌다 다시 넓어지고
머리는 길렀다 잘랐다하고
한창 기술이 발전하나 싶었는데,
다시 옛 기계들이 사랑을 받습니다.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고
그 사이 사이를 다시 돌아온 무언가가
채워 나가는 것이 삶인가 싶습니다.
지금 중앙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은
스무 살에 어느 정도의 바지통을 입고 다니며
어떤 감성과 유행으로 살아갈까요,
그때도 자매문구가 있을까요,
그때도 우리 아파트 입구의 나무는
건강하고 푸르렀으면 좋겠습니다.
- 안경준, #27, 20240630.
그러니까 그게..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오래된 일인가를 생각할 때,
내 얼굴에 마스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 홍경은, #6, 20240630.
주 앞에 설 때까지
나는 어떻게/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나.
음. 난 여름 성경학교를 모른다. 그렇지만 4학년 때까지 여름 방학마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서 거의 방학이 끝날 때까지 놀았었는데, 그 때 할아버지 댁 앞에 있는 교회에 간 적이 있다. 드르륵 하얀색 페인트칠이 까진 미닫이 문을 열면, 신발을 벗을 수 있는 곳이 나오고, 또 나무 미닫이 문을 열면, 나무 냄새 나는 긴 마루바닥 방이 나온다. 지하가 아닌 데도 지하에 내려간 것처럼 뭔가 어둡고 시원했고, 방 앞쪽에는 나무로 된 책상들과 바닥에는 자주색 방석들, 그리고 그 옆에 검은 두꺼운 책. 그 방 가운데 벽에는 나무 십자가가 있었다. 그 때는 그게 십자가인줄도, 그 방에서 예배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거 같다. 선풍기가 있었고, 오르간? 풍금? 피아노는 분명 아닌 악기가 하나 있었고, 창문은 닫혀 있었던 거 같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새벽에 교회에서 종치는 소리, 예배 오라고 트는 찬양소리는 좋아하지 않으셨던 거 같으니, 난 고종사촌들과 같이 갔을 것이다. 고모도 교회는 안 다니셨지만, 애들이 놀러 가는 그 곳에 나도 갔었다.
그러다 6학년 때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에게 전도되었고, 나는 엄마를 따라 교회에 갔다. 첫 날부터 나는 교회가 좋았다. 어린이는 나와 오빠를 포함해 5명 밖에 없었지만, 비가 오면 물이 새서 시멘트 바닥이 척척했던, 그 지하 냄새가 분명한 어두운 지하실에 있는, 시끄러운 시장 입구에 있는 지하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좋았다. 그 노래는 찬양이라고 했고, 찬양은 한 분 하나님께만 부르는 것이라고 목사님이 그러셨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 댁에 가서 목사님의 딸, 언니와 노는 것이 재밌었고 주시는 간식 먹으면서 만화 성경보는 게 정말 최고였다. 오락실도 안가는 나였지만, 그 만화책에 아주 깊이 빠졌었다. 가끔 목사님의 봉고차를 타고 큰 온누리교회 집회에도 갔었다. 어른이 되어 그 교회가 서빙고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때는 그냥 아주 멀리 가서 예배하고 찬양 실컷 부르는 게 좋았다. 성경공부시간에 우리 아빠가 당시 교회에 다니지 않으시기 때문에, 돌아가시고 나서는 천국에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울면서 뛰쳐나간 날, 크리스마스에 밤 새워, 새벽송을 돌며 어린이/청소년 5명이 교회에서 논다고 하면 엄마 허락 FREE PASS였던, 교회는 무조건 좋았던 날들이었다.
미션스쿨 고등학교를 가고, 1-2학년 때는 종교부장을 했고 교내 찬양제 때 지휘도 하고, 경건회를 매일 인도하면서 시대의우상 HOT 팬클럽 친구들과 갈등을 하는 것은, 마귀들에 붙들린 친구들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싸움이라 여기며 씩씩거렸었다. 그리고 3학년 때 그동안 지도해 주셨던 전도사님이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교회를 떠나시며, 내게 <화해의아이>를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내게 선교사가 되라고 하셨다. 아직 그 붉은 책이 책장에 꽂혀 있고, 두 번 그 책을 읽었고, 나는 지금 선교사가 되지 않았지만, 처음에 그가 책을 주셨을 때는 좀 무서웠다. 선교사가 될 까봐. 웃기지만 정말로 전도사님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 책을 읽으면 선교사가 될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을 서른 가까이 되어 읽었던 거 같다. 첫 백수가 되었을 때. 그 좋은 책을 그 나이를 먹고, 그렇게 두 번을 읽고 울었었다.
대학 2학년 때 엄마가 긴 방학에 들어가시며, 그 때부터 나 홀로 교회 생활이 시작되었다. 지하교회는 건물 2층으로 이사했고, 엄마가 그 교회를 떠나시며 나도 교회언니에게 서운함이 있어서 또 마침 집이 이사를 했다는 핑계로 좀 더 큰 교회로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평일에는 신나게 놀고, 주일에는 울며 두 손들고 나오는 썬데이 크리스천, 열등감, 못남, 포기, 인내하지 못한 자아 등등을 가진 대학부 쩜쩜쩜 생활을 했다. 가고 싶을 때가고, 안 가고 싶을 때 안가도 누구도 상관하지 않고, 나만 답답한 삶이었다. 어정쩡하게 앉아있다가, 갑자기 울다가, 그러다 또 우울해지면 집에서 안 나가니까 주일에 당연히 예배를 안 갔다.
그러다 다시 집이 이사하고, 고등학교 때 친구, 친구의 가족이 다니는 집 앞 교회에 다녔다. 다시 찬양이 좋아졌다. 당시 내 신앙은 성경 말씀과 설교는 원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까 괜찮았고, 친구가 있는 성가대에 들어가서 지휘자님이랑 셋이 어울려 노는 것이, ‘성도의 교제‘였다. 6학년 때부터 냈던 십일조를 900배로 드렸던 시기고(그래서 물질의 복까지 받았다고 생각했던), 새벽예배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정장을 입고 나와 찬양해야 한다는 군인출신 교회 오빠가 무서웠지만. 사람을 만날 때 잘 차려 입으면서 하나님 앞에 졸린 눈 비비고 나와야 되겠냐는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며 4시 45분까지 한 번도 늦지 않고 갔었던 시절이다. 신천지 아저씨가 성가대에 들어와 따로 성경공부를 하자고 해서 짜증난 적도 있었지만, 성가대 생활이 참 좋았고, 성가곡을 부르고 배우며 눈물 흘리는 매 주가 좋았다. 군부대에 가서 찬양하고 성극 공연을 한적도 있었고, 장애인 복지 시설에 가서 함께 예배하고 봉사한 기억도 있다. 무서운 교회 오빠와 찬양인도를 했기 때문에 사귄다는 오해를 받기는 했지만, 그 때 그가 주었던 mp3찬양 파일이 아직 고맙다.
서른을 지나고 만 서른이 되기 직전, 워킹 홀리데이, 아는 이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Desire GOD! 성경은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설교도 동일하게 받아들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찬양은 ‘내가 좋으라고’하는 것이 아닌 것을 하나님이 직접 알려주셨다. 기도는 응답이 되는 것이며 그 응답도 나 뜻대로 아닌, 하나님 뜻대로가 응답이라는 것을 그 곳에서 알려주셨다. 진짜로 혼자일 때 혼자가 아닌 것을 알게 하시고, 여럿과 함께 있을 때 혼자라도 괜찮게 하셨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인도를 알려주셨다. 워킹 홀리데이에서 집으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교회를 다니지 않으시는 아빠가 지금의 교회로 내가 먼저 다니다 보면 자신도 언젠가 다닐 수 있지 않겠냐고 하셨던 날을 주셨고, 실제 몇 년 뒤 아빠는 엄마와 함께 교회에 오셨다. 아빠와의 헤어짐은 아직도 슬프고, 아빠의 이 땅에서의 교회 생활은 2년 정도였지만, 아빠를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은혜를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예배할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기도 응답으로 월드비전에서 일하며, 2024년 fable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여정을 쓰고 있다.
어쩌면 나는 교회를 13살부터 다닌 것이 아니라, 31살부터 다녔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아니면 내가 죄를 질 때마다 들락날락, 그리고 성령이 충만할 때는 대문자 C그리스도인,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는 소문자나 아에 안보이는 c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긴 글을 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못 쓴 시간들이 있고, 그 모든 순간에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셨던 적은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 때문에 그 시간들은 내게 다 필요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만, 절대로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살고 있을 때에도,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 나를 구원하셨고 성령님으로 나를 이끄시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은 인생이 되게 하셨다. 계속해서 나는 발을 씻으며 살겠지만, 그분 앞에 설 때까지 그의 생명수를 마실 것이고, 깨끗하다 여김 받을 것이다. 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 박경선, #20, 20240703.
옥상 상추, 깻 잎, 각종 쌈 야채, 고수, 고추, 토마토, 오이, 참외, 그리고 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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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니의 텃밭에서
- 박경선, #21, 20240703.
숯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_시편 102편 3절.
지난 날 잠언을 읽으며 나를 괴롭힌 리더를 위해 기도했었다. 주님, 내 원수(그녀)의 머리에 숯불을 올려주십시오. 열심히 기도했고, 그녀의 고통과 눈물, 아픔에 주님의 응답으로 감사했지만 너무 철저히 무너지는 그녀를 보면서 회개했었다. 사람은 사랑만 하라, 원수는 내가 너보다 잘 갚는다. 그러니 너는 네 할 일만, 사랑만 하라. 시편 102편 3절을 읽으며 그녀가 생각나서 또 회개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 없는 나를 보면서 또 기도한다.
- 박경선, #22, 20240703.
월드비전을 떼고 나의 업을 말하기
입사할 때 일은 모르겠고, 월드비전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퇴사하기 전에 꼭 생각해야 하는 점은 회사 이름을 떼고 하는 일을 설명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것이라고 하던데, 나는 회사 타이틀 없이 어떤 ‘내 일’로 타이틀을 걸 수 있을 까. 어이쿠. 아직은 퇴사하면 안 되는 이유 하나가 이것 일까.
한 동료와 밥을 먹으며 팀을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 ‘어짜피’ 직군 때문에 이동하지 못하는 ‘어짜피’에 분노가 생긴다는, 그것은 ‘불평’ ‘차별’이라 받아들여진다는 그/그녀. 나는 ‘모두’ 까지는 아니더라도 ‘다 수‘가 당신처럼 생각하는 지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회사는 소수의 리더가 결정하는 대로 흘러가기 마련인데, 그 소수의 의견을 바꿀 때 모두나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 보다는 강하게 리더에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이고, 숫자를 떠나 ‘의미’만을 따라 바꿀 수 있는 리더는 또 한 켠의 ‘불평’과 ‘차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회사생활 10년이 지나니 모집공고 기준에서 ‘상담직군’이라는 언급이 됐다는 것에 오히려 의미를 찾을 수 있고, 회사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지를, 이제야 이정도인데도 회사가 유지되는 것, 모든 것이 은혜임을 고백할 따름이라 말했다. 느리지만 변화는 있고, 다 뜻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게 아니면 또 어쩔 것 인가. 그것을 따지는 것도 이제는 모르겠다. 회사 타이틀을 떼고 내 업을 말할 수 있는 것이 먼저이고, 그 후 계속 일하던 퇴사하던 그것은 그 때 다시 주님의 뜻을 구하면 되지 않을 까. 입사 공고에 먼저 이런 사정을 안내하지 않아서, 정말 억울한 게 맞을까. 그래도 일할 수밖에 없어서 계속해서 일하는 게 아닐까.
- 박경선, #23, 20240703.
길 잃은게 럭키
종종 찾는 불암산이지만 오늘은 안 가본 길로 산행을 해보았다.
상계역을 지나쳐 동아불암아파트 정거장에서 내려 경수사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초반에는 계단 길, 한참을 오르다 보면 궈여운 사이즈의 폭포와 개울이 시원하게 흐르고 로프가 놓여진 암릉 구간을 지나면 마지막 쥐바위를 지나쳐 정상에 닿는다.
구름은 낮게 깔리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힘들지 않게 정상에 올라 간식을 먹고 불암산성을 지나쳐 삼육대학교 방향으로 하산 완료!
사실은 화랑대역 백세문 방향으로 하산하려고 했는데 갈림길을 놓쳐서 삼육대학교로 내려오게 되었다.
예상 못한 등산로로 허둥지둥 내려왔는데 산길 끝 수풀을 지나 한 걸음 내 딛었을때 그림처럼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길 잃은게 완전 럭키!
잠깐 꿈꾸는 기분으로 호수를 조망하고 마무리한 길 잃은게 럭키했던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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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hopes
아일랜드에 있던 시절, 뭐가 그리 힘들고 외로웠는지 이제는 기억도 안 나지만, 그랬던 시절이 있었더란다.
잠시 모든 것에서 멀어져 오직 내 자신하고만의 시간을 가졌던 그때 그시간들.
그래서 더 힘들게 느껴졌던 것같다.
돌이켜보면 지금 생활보다 여유롭고 참 좋았지만:-)
그럴 때마다 들었던 나의 위로곡.
HIGH HOPES - Kodaline
참 많이도 들었다. 괜히 아일랜드 출신 밴드라는 것도 좋았고, 그땐 가사 한 글자 조차도 안 들릴 때인데 나의 허망함과 허함을 대신 외쳐주는 것 같아서였을까. 들을수록 위로를 많이 받았다.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는 한참 잊고 살았는데, 사람들 꽉 차서 숨쉬기도 힘든 출근길 지하철에서 랜덤재생 중에 내 귀로 흘러 들어왔다.
딱 첫 소절을 들었을 뿐인데 뭐가 그리도 많은 게 생각나고 스쳐 지나가는지..!
그날의 나를 치유해주고 마음을 비워주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그 시절의 내 위로곡:)
겹겹이 쌓인 그 시간들을 이 노래 한 곡으로 기록해본다.
- 편혜정, #1, 20240708.
무제
월요일 점심시간, 어김 없이 책을 펼쳐 말씀을 찾아나섰다.
어떤 말씀? 바로 6층 동료들에게 전하는 ‘7월 2째 주 말씀’이다.
본래 이 목적으로 구입된 보드판도 아니었고 내가 담당자도 아니었으나
길을 터주신 선배의 해외 출장 이후로 몇개 월째 끄적이는 역할을 맡고 있다.
처음엔 아무생각 없이 적었다.
보는 사람이 있나? 이게 힘이 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나의 역할을 들킨 후) 말씀 참 좋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번 주에 주실 말씀을 나부터 기대하게 되고
총 7일의 말씀 중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는 말씀이 무엇일지 고민도 하게 되었다.
감사하다. 들킨 건 부끄럽지만 힘을 받는 누군가가 있다니 오늘도 고민 끝에 적어보았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62:6)”
- 유하선, #10, 20240708.
AM 01:09
잠이 비라면 30년이 넘게 불면인 내 몸은 사막인가보다
그렇다면 내 몸 어딘가에 오아시스도 있을텐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 김경태, #23, 20240710.
언니
언니에 대한 첫 기억은,
동생이 생긴 저에게 이제 저는 찬밥신세라며 짓궂게 놀리던 모습입니다.
6살밖에 되지 않았던 저는 그 얘길 듣고, 평생 이제 찬밥만 먹게 되는거라고 생각해서 펑펑 서럽게 울었다지요.
그리고 이어지던 기억들은, 항상 엄마와 싸우던 모습, 동생만 귀여워 하던 모습, 나를 놀리던 모습, 가족행사에서는 언제나 핸드폰만 보던 모습으로 채워졌었어요.
그래서였을까요? 참 오랜시간 언니를 친근하게 대하지 못하고, 나아가 미워했었습니다. 여기에는 이쁜 미모를 가진 언니와 달리 까맣고 못난이 소리를 듣던 저의 작고 고약한 질투심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세월이 지나, 언니가 결혼을 했습니다. 자매가 결혼하면 눈물이 난다던데 그런 것도 없이 담백하게 시집을 가는구나 - 했더랍니다.
그러던 중, 코로나 시절, 그 누구랑도 만나지 못하니 자매들의 만남이 잦아지고, 보살펴야 할 강아지가 생기면서 언니와 강아지를 매개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 시간들을 보내며 언니를 처음 알게 된 것들이 참 많았어요.
그때부터 제 눈에 보여진 우리 언니는, 잔정 많고 눈물 많은 사람, 웃기고 싶지만 못 웃겨서 그게 또 웃긴 사람, 똑 부러지게 주어진 것을 잘 해내는 사람, 어려움이 있어도 금방 회복하고 자신의 세상을 잘 가꾸어 내는 사람 이더군요.
나의 좁디 좁은 시선 속에 우리 언니를 남모르게 나무라고 있었구나 싶어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래서 형보다 나은 아우가 없다는 말이 있나 보구나 했어요.
돌이켜보면 제 못난 시선 속 언니도 참 어렸습니다. 동생이 2명이나 생겨버린 12살의 초등학생이었고, 사춘기에 접어든 15살 소녀였고, 해보고 싶은게 많아 얽매이고 싶지 않았을 20대 청년이었더라구요.
이젠 더없이 소중해진 나의 언니, 항상 더 잘하려고 해도 언니가 해주는 것 만큼은 따라가지도 못하지만, 앞으로는 때론 친구처럼, 때론 언니처럼, 때론 언니가 막 부려도 될 유일한 동생이 되어보려고 합니다.
- 편혜정, #2, 20240710.
무슨 말일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말...
그 말은 얼룩말.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말은 사랑한다는 말
아이러브유 주뗌므 워아이니 아이시테루 사랑해 등등
여러가지 말말말.
- 강하람, #1, 20240710.
AM 0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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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와중에 잠깐 속살을 드러낸 어제 이뻤던 하늘을 생각하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늘을 대하는 자세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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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하늘도 구름 낀 하늘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그 모든 변화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음에도 날마다 변함없이 하늘을 바라봐주고 그 변화를 불평없이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비 올때는 우산을 쓰고 토도도독 쏴아쏴아 우르릉 쾅쾅 빗방울 소리와 천둥번개 소리까지 즐기며 하늘 아래를 거닐고, 구름 낀 날은 갖가지 구름 모양을 찾아보고 여러 이미지들을 빗대어 상상하며 하늘 아래를 거닐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에는 탁 트인 창공을 마음에 품고 하늘 아래를 거닐면서 하늘과 함께 하는 것.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과 같이 그 존재만으로 감사해하고 존중하고 때론 거센 비바람으로 나를 적시고, 태풍으로 몰아세우는 날이 있더라도 매일의 그 변화를 묵묵히 지켜봐주고 기다리고 그렇게 함께 하는 것.
사랑이란 그런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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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메뉴
점심에 집밥을 먹었다. 오늘의 메뉴는ㅡ월드비전 입사하고 기뻐하는 나를 보며(뭔가 안쓰러운 눈 빛이었음.), “결국 니가 그 길을 가는구나.”라고 했던 오빠가 아침에 보낸 한우를 버터 넣고 양파+표고랑 구워서 후추 팍팍 구이, 그리고 엄마, “금방 무치니까 이거랑 같이 먹어.” 참기름 파송송 가지 나물, 또 마마스 상자텃밭 고추와 상추와 깻잎, 호밀식빵 한 조각, 고모네 감자를 넣고 기타 등등 마마 비법으로 만든 샐러드, 마지막으로 오빠의 최고 애정 반찬 마마스 오이지. 디저트로는 마마스 토마토. 든든 든든 든든 든든한, 향긋한 행복한 점심 메뉴였다.
- 박경선, #24, 20240711.
기도, 사랑, 그리고.
하나님, 사랑이 무엇일까요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밥을 짓고 아이들을 재웁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의의 느티나무숲교회 지인님의 기도 중-
새로운 교회의 등록교인이 되었고, 청년부 MT를 다녀왔다. 담임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함께 저녁을 드시고 가셨고, 청년부원 한 명 한 명에게, 시집을 선물해주고 가셨다. 그리고 마지막 기도를 사모님께서 해주셨는데, 위의 기도를 해주셨다. 듣던 그 때의 온도와 저 기도를 읊조리던 목소리, 함께 하는 이들이 그 시간 그 공간에서만 오롯하게 느낄 수 있었던 공기로 인해 저 기도는 참말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기도가 끝난 후 더듬거리며 내 기억을 꺼내어 메모해둔 것이라서, 아마 조금의 내용의 차이는 있겠지만서도, 들으며, 적으며, 나는 저 기도가 너무도 좋았던 것이다. 기도는 이토록 솔직해야 마땅한 것이다. 기도는 내가 모르겠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기도는 내가 믿는 신에게 내 삶의 가장 소소한 일상을 작게 한번 내뱉어보는 것이다.
교회에는 ‘사모’라는 이상한 직분(?)이 존재한다. 목사 혹은 사역자만큼의 급여를 받지도 못하고, 마땅하게 어디 소속되는 공동체도 없기 마련인 어쩌면 외로운 자리, 어쩌면 이름이 사라진 자리. 그래서 나는 저 기도문을 사모님의 기도가 아닌, ‘지인님의 기도’ 라고 이름을 붙여두려고 한다. (성을 까먹었다. 아뿔싸.)
사랑이 무언지에 대해서 늘 고민해보게 된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는 고백만큼 진실하고 진리스러운 말도 없게 된다. 재미있게도 fabler 들의 최근 글들의 주제가 ‘사랑’인 것 같다. 하람님은 사랑해라는 말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고, 경태님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변해가는 하늘을 보며 그것의 매일의 변화를 지켜보고 존중하는 것으로 사랑을 이야기 해주셨다. 혜정님은 언니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우정으로 사랑을 그려냈으며, 경선님은 마마스 썸띵으로 그 사랑을 그려내신것 같다.
결국 저 기도문과 fable의 기록과 고백과 감상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사랑의 일상성으로 돌아오게 된다. 난 그것이 무언지 여전히도 모르겠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행위를 하나씩 해내고, 마음을 먹어보고, 그 마음으로 눈을 띄우고 그 눈으로 내 앞의 존재를 바라보는 것. 나는 방과 화장실을 청소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가득찬 쓰레기통을 비워내고, 기르려던 머리를 잘라내고, 지금 내 앞에 산적한 일들을 조금씩은 처리해나가보고, 좋은 글을 읽어가 보아야 겠다.
하나님, 사랑은 무엇일까요? 저는 다만 오늘 살아 호흡할 따름입니다.
- 안경준, #28, 20240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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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화
'레위기 16장 30-31절'
30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31 이는 너희에게 안식일 중의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Because on this day atonement will be made for you, to cleanse you. Then, before the LORD, you will be clean from all your sins. It is a day of sabbath rest, and you must deny yourselves; it is a lasting ordinance.
후회되는 과거가 있니. 하나님 앞에 고백해. 죄 안녕~ 하고 보내버려. 네 안에 뭐가 있다고, 네가 너를 위해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 정도는 해야지, 너무 쉽잖아하고 생각하고 있어? 하나님이 다 하시는 것은 알겠는데, 이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닌 가라고 생각하는 ‘이렇게’가 있는 거야? 근데 있잖아, 그분이 네가 생각하는 그게 없으셔서 네가 필요하시겠어? 그분이 다 하셨고, 그분에게 동참하면 되는 거야. 네가 뭘 더할 것은 없어. Deny yourself. Desire God!
매일 매일의 삶이 너의 인생이 되는 거, 이쯤 살았으면 알...지 않아? 고등학교 졸업식 설교 말씀, 아직도 기억하고 있잖아. 습관이 너의 인생이 된다고 하셨잖아. 너가 잘못된 선택과 시간 사용으로 후회할 때마다, ~할 껄...하면서 또 한숨 쉴 때마다 이미 넌 그 어린 그 때부터 네 기억에 심어주신 그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 좋은 거 하면서 살아왔으면서도, 그래도... 살았잖아. 넌 알고 있었다고. 알아, 알아. 너는 또 너가 좋아하는 것들로 너의 시간을 쓸 수도 있어. 아니, 그럴 때가 또 올거야. 아, 실패하고 후회하는 거 지겹다고? 지겨워서 뭐 어쩔 것인데? 그럼 이 삶, 안 살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너의 존재도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을 때, 그 때도 넌 이미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니까 일단 꺼. 전기 제품 전원 끄듯이 끄라고. 껐다가 다시 켜면 되. Deny yourself. Desire God!
그래, 다시 일어나면 되지. 그런데, 왜 이러지? 호주병이 걸린 건 가. (호주병: 읽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워홀로 호주 시드니에 350일을 살고 온 적이 있는데, 가끔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병에 걸린다, 1년에 2-3번 쯤. 이민 기준을 알아보기도 하고, 자산을 계산해 보기도 하다가, 호주식 영어 공부가 작심 3일이 서너번 반복 될 쯤 낫는 병이다.) 그래, 뭐 그것도 괜찮아. 그런데 이제 병이라고 하지 말고 꿈이라고 해볼래? 시드니 살면 더 치열해야 하고, 외롭고, 결코 괜찮지만은 않은거, 너 살아봐서 알잖아. 그리고 지금, 이미 너가 꿈꿀 수 없는 삶을 살게 해주셨다는 것도 알지? 물론 시드니에서는 너 혼자니까, 더 하나님과 가깝다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그런거야? 너 잘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인 거 살아봐서 알잖아. 그리고 호주병은 공부하면 나으니까, Deny yourself. Desire God!
- 박경선, #25, 20240714.
소유자 미상
알다가도 모르겠고
무겁다가도 가볍고
편하다가도 불편하고
그리운 이를 잊은듯하였지만 다시 또 진하게 그립고
내 마음은 내 것인데 내 것이 아니다
- 안은진, #1, 20240716.
AM 07:17
때론 글을 쓰는 건 마음에 옷을 입히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그날의 상태와 기분이 외모의 꾸밈에서 드러나듯 누군가의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의 마음이 그때 어떤 옷을 입고 있었을지를 상상하게 된다.
우리는 실제의 외모도 날마다 감추고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 드러내고 가족이나 연인 친구 등 그 친밀함의 정도에 따라 속살을 드러낸다.
그럼 마음은 어떨까?
속살을 드러내는 것도 힘든 일인데 마음을 드러내는 건 정말 만배는 더 어려운것 같다. 반바지를 입었다가 무릅이 까이면 소독하고 약바르고 손쉽게 치료할 수 있지만
마음의 무릅이 까이면 까인걸 알아채는 것조차 모른채 줄줄 피를 흘리고 곪아서 악취가 진동하고서야 알아채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마음을 드러내는 건 아무리 친밀한 가족, 연인, 친구에게도 쉬운일 아니다.
또한 그래서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채는 것 역시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그나마 글 속에 묻어나는 감성으로 지레 짐작할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마음의 속살을 드러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가.
나에게 마음의 속살을 드러내주는 누군가가 있는가.
일방향의 관계도 쉽게 맵기 어려운데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런 관계야 말로 흔히 말하는 소울메이트, 영혼의 단짝, 실과 바늘과 같은 사이일 것이다. 가족 연인 친구 그런 관계와는 또 다른 관계일 것이다.
나이, 성별, 외모, 사회의 위치, 처한 상황 어떤 프레임에도 매이지 않고 세상이 정한 룰에 구애 받지 않고, 존재 자체만으로 서로에게 유니콘이 되어주는 인연이 있기를, 스스로는 알아채지 못하는 마음의 생채기를 알아봐주고 보듬어주고 마음의 온도를 맞출 수 있는 그런 인연이 있기를 그 인연을 알아볼 수 있기를, 용기내어 서로에게 마음을 드러내고 다가갈 수 있기를 나의 시간속에 당신의 시간 속에 그런 날들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수요일 오후 반차
감기가 걸리고 거의 나았다고 생각했었다. 잔기침은 계속 있었지만. 토요일에 늘어지고 게을러진 것 90%와 기침이 나는 것 10%로 교구 예배를 빠졌고, 주일에 예배 마치고 친구와 밥 먹고 커피 마셨다. 매운 라면 국물로 점심에 기름진 거 내리고, 다시 교회로 가서 저녁 예배 찬양을 열심히 부르고 예배드리고 집에 왔다. 목이 마르고 찬물을 마시고 싶어서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꺼내 마셨다. 우리집 정수기는 정수만 나오니까. 그리고 월요일 아침,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흡. 순간 토요일 핑계로 예배 빠진 것 때문인가, 친구랑 밥 먹을 때 콜라 먹고 바로 또 커피 마시고 그 다음에 큰 목소리로 찬양을 불러서 목을 아주 건조하게 만든 탓인가. 아 나 뭐하냐. 말하는 일하는 내가 목소리가 안나온다. 인어도 아닌데.
그리고 오늘까지 조금씩 회복되고 있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사오정 목소리보다도 적게 그리고 더 굴곡진, 아니면 그냥 말하는 데 한없이 귓속말로 말하는 쉰 소리. 월요일에 오전 반반차 쓰고 병원 갔고, 내일까지 먹을 수 있는 약을 받아왔지만 오늘 반차를 쓰고 다시 갔다. 목소리 돌아오는 약을 지어 주시오! 의사선생님은 이미 먹고 있는 약이 목소리 돌아오는 약이고, 목이 부었지만 일단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쪽으로 해보고, 이 모든 약을 다 먹고서도 밥에 잘 때 계속해서 기침이 나서 깬다면 내과에 가서 폐 엑스레이를 찍어보라고 했다. 월요일보다는 목소리가 돌아왔지만 여전히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 어려운 목소리, 월요일과 화요일 그리고 오늘 오전까지는 전화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을 했는데, 전화 업무는 다음 주로 미뤄야 하는 것 일까.
팔로우하는 출판사에서 이해인 수녀의 시의 일부를 올렸다. 아, 그녀는 정말 좋은 작가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녀의 에세이를 읽고 참 많이 가슴쳤었는데, 또 다시 툭툭 친다.
주님, 저의 교만과 잘못을, 입술을 용서하여 주소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아무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님 앞에 회개이고 기도이고 감사라는 것을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 때의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 일을 영영하지 못하는 상상까지 하는 저이지만, 그렇게 될 지라도 주님께 감사하는 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일을 할 수 있다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해인, [오늘을 위한 기도] 중에서ㅡ하고 싶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하기 싫지만 꼭 해야 할 일들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슬기를 주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밖에는 없는 것처럼 투신하는 아름다운 열정이 제 안에 항상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당황하고 속상했지만, 원하지 않는 항생제를 먹고 감기약으로 몽롱하지만, 그래도 저래도 이래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하는 월드비전의 일을 멈추지 않고 싶어하는 저의 마음을 상기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님 하실 수 있거든이, 저의 목소리가 다시 돌아와 말할 수 있게 하소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하신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M 10:49 불암산 정상에서
20여년만에 백패킹을 하러 나왔다.
수년전부터 버킷리스트에 올라가 있었지만 이런 사정, 저런 이유로 항상 우선 순위에서 밀리고 밀려 반쯤은 포기하고 살아왔다. 그러다 얼마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드디어 단호한 결심을 하고 생일을 핑계로 텐트며 장비들을 한꺼번에 질러버렸다. 나에게 쇼핑은 언제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자식으로써 남편으로써 부모로써 내 삶의 욕구보다 대부분은 누군가의 필요를 충족 시키기 위한 행위였다. 그래서인지 나의 필요가 아닌 욕구를 위한 소비를 하는 행위 자체가 나에겐 엄청나게 자극적인 행위여서 시작이 어렵지 시작되면 잘 끝내질 못하고 과잉 소비를 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만 사도 되는 텐트를 두 동이나 산다던지 말이다.
어쨌든 그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장만한 용품들을 배낭에 쑤셔놓고 보니 꼭 하나씩 빠진게 생각이 나서 또 부랴부랴 당근으로 쿠팡으로 다이소로 왔다갔다 배낭을 꾸렸다 풀었다를 몇번을 반복하는지 사실은 어제 가려던 백패킹이 오늘로 미뤄진것도 그 때문이다. 막상 다 준비한 것 같은데도 불안해서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그래서 하루하루 미루고 준비만 하다 이도저도 아닌게 되어버리는 그런 거다. 오후까지도 그렇게 또 몇번을 배낭을 다시 고쳐 싸다가 또다시 단호한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는데 시간은 벌써 5시, 언제 산을 오르고 해가 지기 전에 텐트를 칠수 있을지 과연 비는 내릴질 안 내릴지 상계역에서부터 불암산 정상까지 흐르는 땀을 훔칠 틈도 없이 발걸음을 내딛는데 배낭은 왜이렇게 무거운건지.
20대때는 배낭에 물 한병들고 캔버스화를 신고도 산으로 강으로 참 즐겁게 잘 다녔던것 같은데, 왜 이렇게 챙길께 많고 왜 이렇게 무겁게 싸매고 가야하는 백패킹이 된건지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나는 이런 보부상이 되었는지 걸음을 옮길때마다 땀방울인지 눈물인지 짠물이 입술을 적실때마다 지난날을 반추했다.
초등학교때는 가방도 안들고 책 한권만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고 별명이 대학생이었는데 대학생때도 물한병이면 자전거를 타고 전국 일주를 떠나고 책한권과 카메라만 매고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났던 나였는데 왜 이제는 항상 쓰지도 않을 용품들을 백팩에 잔뜩 챙기고 매일 같이 출퇴근을 하는지 내 가방에는 HDMI 케이블이, 각종 젠더들과 바람막이와 우산과 여권은 또 왜 넣고 다니는건지 말이다. 모가 그렇게 불안하고 왜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애쓰게 된걸까?
대학생 시절 자취할때 내 방은 책들과 카메라, 기타, 이불과 조리도구가 전부였다. 장도 없고 책상도 의자도 없고, 티비나 침대도 없었다. 꼭 필요한게 아니라면 구비하지 않았고 필요한 그때만 사용하고 나면 바로바로 정리해버리곤 했다. 사람들의 생각보다 나의 주관과 내가 원하는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갔다. 난 고독히 걸어가며 악을 낳지 않고 원하는 것이 적은 삶을 살아가길 원했으니까. 인간관계도 최소한으로 유지하며 굳이 누군가와 친해지려 애쓰지도 않았고 주위에 사람들이 많아지면 자리를 피하곤 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도 마음도 그렇게 미니멀하게 살아갔고 평안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가족의 부탁으로 친구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맞춰주는 게 늘어나더니 내가 추구하던 삶의 방향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몇십만 광년은 떨어진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어느새 나에게도 장농이 생기고 수년째 한번을 안 입은 옷들이 쌓여가고 신발장에도 먼지만 가득한 신발들이 가득차있다. 어디서 받은건지 구입한 건지도 모를 식기와 컵들이 찬장에 넘치도록 들어차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친구들 지인들 심지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신기하게 나에게 자신들의 응어리를 털어 놓고 간다. 그들에게 마음의 해우소가 나인듯 내안에는 그들의 응어리들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정작 내 마음은 둘 곳 찾기가 어렵다. 한번 몰입하면 과도하게 상대방에게 감정 이입하는 때문인지 어느때는 이게 내 마음인지 누구의 마음인지도 헷갈릴 때도 있다. 분명 처음엔 푸르는 대나무숲이었을텐데 나와 누군가의 빼곡한 응어리들로 너무 잡다한 색들이 섞이다 보니 이젠 무슨 색인지도 알아볼 수 없는 회색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불면증으로 항상 엉망인 몸 컨디션에 더해 마음은 더 엉망이라 정말 살기 위해 숨 구멍을 찾아 헬스장을 다니고 주말 새벽엔 홀로 산을 올랐다. 그렇게 조금씩이라도 숨구멍을 뚫고 마음을 희석하지 않으면 정말 회색 콘트리트 덩어리가 단단해지고 무거워져서 숨이 막혀 죽어버릴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무 멀리 와버려서 완전히 모든걸 되돌리고 원하는 삶의 목표지점까지 정확히 도달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조금씩 방향을 돌려보고자 한다. 누군가에겐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 세찬 비바람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이 풍경속에 있는것이 공포이고 두렵고 힘든 일이겠지만 나에겐 평안하고 자유함을 주는 일이듯 내가 원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겠다 더 늦기 전에.
산을 내려가면 당장 옷장에 쌓인 안 입는 옷들과 신발장의 먼지 쌓인 신발들부터 버릴것이다. 내 방에 오랫동안 쌓여져가고 있는 디지털기기들과 다양한 가젯들도 다 처분할 것이다. 매일 신경쓰며 드라이해야했던 머리도 짧게 정리하고 사용하지 않는 핸드폰과 아이패드의 어플들도 정리해야지. 그리고 사람들, 자신들이 필요할때만 찾아오고 그저 편하게 이용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에게 더이상 내 시간을 할애하지 말아야지. 누군가의 필요를 위해 큰 가방을 가득 채우거나 생기지도 않은 일에 대비해 넣고 다니는 용품들도 다 빼놓고 그날 그날에 필요한것만 챙겨다녀야지. 가족 관계에서 친구 관계에서 동료 관계에서의 책임들을 필요 이상으로 챙기고 떠맡지 말고 사람들이 하는 만큼만 신경쓰고 챙겨야지. 스스로가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지도록 에너지가 소비되는 일보다 충전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겠다. 그렇게 고독히 걸으며 악을 낳지 않으며 원하는 것이 적은 삶을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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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시 연락하라는 차량의 차주 휴대폰 번호 옆에 써 있던 문구다.
주변에 결혼하는 친구들이 소식을 전해온다. 청첩장을 받으러 가는 길, 그동안 내 삶 사느라 정말 친한 친구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음이(사실 관심이 없었음이) 느껴졌다.
이건 딴 얘긴데, 아이들에게 청모가 뭐냐고 물어봤다가 야유를 들었다. 청첩장 모임인 것을 이때 알았다. 아무튼 삶을 내달리다 보면 찰나의 것들을 놓칠 수도 있겠다.
빨래를 개면서 가족과 나누는 대화, 편의점에서 물건을 계산해 주던 알바생의 초점 없는 눈빛, 고양이가 돌담을 오를 때 드러내는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유연한 곡선, 친구의 청첩장 속 젊음의 절정을 느끼게 해주는 한 쌍의 커플 사진을 보는 것......... 슬로 모션으로 순간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속도를 줄이면 사람 그리고 삶이 보입니다.
- 강하람, #2, 20240722.
갑작스레 괜찮아짐
그토록 바라던 날이 그저 갑자기 찾아왔다. 2024년 6월은 내가 두고 두고 기억할 내 삶의 최저컨디션의 한 달이었는데, 거짓말처럼 7월이 되면서 그냥 제법 괜찮아져버린 것이다. 6월 내내 기관지가 망가져있었고, 코막힘과 동시에 줄줄 흐르는 콧물은 삶의 질을 떨어뜨려보자고 아우성이었다. 기침은 또 왜 이렇게 났는지. 이놈의 몸뚱아리는, 살아보자고 건강하기도 모자를 판국에 아프고 지랄이었던 것이다. 삶은 권태로웠고, 몸은 무거웠으며, 방 안에 있던 빨래 건조대를 6월 내내 접어두지도 않았으니 무기력과 귀찮음은 말 다했다. 마른 빨래를 건조대에서 그냥 대충 주워서 입고, 퇴근하면 다시 빨아서 그냥 대충 던져서 걸어두던 일상. 꿉꿉한 냄새를 풍기며 다녔으려나 하는 걱정을 이제서야 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돌아와서, 그냥 괜찮아졌다. 몸이 다시 괜찮아졌고, 코는 더이상 막히지도 줄줄 흐르지도 않는다. 기침도 안난다. 그렇게 난리 난리더니 괜히 그립게 갑자기 멎었다. 약이든 뭐든 써서, 얼굴 코뼈 속에 가득 들어차있을 그 콧물들을 어떻게든 없애버리고 싶어서 아주 화가 잔뜩 나 있었는데, 그냥 괜찮아졌다. 일전에 경선님은 앞으로 비염과 축농증은 평생 관리가 필요한 영역이 될 거라고 하셨는데, 기왕이면 앞으로 관리가 필요 없게끔 그냥 다시는 경험하지 않고 싶다.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을 안틀고 자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코가 막힐까봐 말이다.)
다시 어쨌든, 몸의 건강, 마음(혹은 정신)의 건강, 그리고 관계의 건강 이 세 가지가 건강할 때 나는 삶이 잘 굴러가고 있구나 하고 느끼는 구나 하고 다시금 발견하게 됐다. 뭐 비단 나뿐이겠는가, 그냥 대부분이 이렇겠지 싶다.
괜찮아져서 다행이다. 6월 한달 나의 우울과 징징댐을 받아내던 내 모든 벗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가만 보면, 그들 모두 각자가 조금씩 내 이런 상황을 나눠 져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외면하지 않고, 꺼지라고 하지 않고, 같잖게 위로하지 않아 준 덕분들인 것이다.
권태를 극복해보고자 벌인 일들이 준 자극들이 나쁘지 않았었으나 대신 괜히 또 바빴던 것 같다. 당분간 다시 가만히 있는 시간들을 가져야겠다.
- 안경준, #29, 20240723.
젖은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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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을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고 오답을 말하게 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해를 갖게 하고 관계를 망치고 스스로의 마음을 자해하고 자격없는 형편없는 인간이 되길 자처하는 그런 괴물이 내 안에 살고 있다. 무의식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그 괴물은 틈틈히 기회를 노리고 불안이 마음을 지배할때면 나타나 나를 내가 가장 멀리하고 싶은 내가 괴물이라고 악마라고 불렀던 모습의 사람들을 닮아가게 만든다.
난 또 넘어지고 그래도 밝은 길로 향해보지만 덧은 늘 내 발밑에 도사리고 뜻하지 않은 순간 나를 넘어뜨리고 끌고 들어간다.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건 스스로밖에 할 수 없는데 내 안의 괴물을 인정하지 않고 타인을 괴물보듯 두려워하며 손쉽게 그들 탓이라고 마음을 속이며 자꾸 어둠으로 뒷걸음질 친다.
어제를 끊어내는 건 그 괴물 역시 나의 수많은 모습중에 하나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괴물이 눈이 아닌 사람의 눈으로 타인을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스스로를 돌이켜 너무 밝아서 눈이 시리고 아프더라도 밝음을 항해 내딛는 한걸음이지 않을까.
불안하고 두렵다고 괴물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가 괴물로 보이고 나에게 향한 모든 말과 행동또한 위협적이고 악의적인 공격으로만 보일테니 불안하고 두려울수록 스스로를 믿기보다 가족들, 친구들,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의 시선에 의지하고 잠시 스스로를 내려놓는다면 괜찮아질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그마저도 할 수 없는 상태라면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 수 없다면 가족도, 친구도,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그 누구에게도 그럴수 없다면 잠시 혼자가 되어 자연에 파묻혀 천둥번개와 비바람속에 웅크리고 있다보면 불안하고 두려움 마음도 조금은 씻기고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더 깊은 어둠으로 맹렬히 돌진하게 될까.
비에 젖어 축축한 신발을 빨아서 거실 에어컨 바람 잘 불어오는 한켠에 말렸는데도 냄새가 살짝 올라와서 마침 햇살이 비추길래 잠시만이라도 햇살로 말려야지 하고 볕 잘 드는 베란다에 아주 잠깐 내놓고 집 앞에 우산도 없이 나갔다 왔는데 그 잠깐 사이에 하늘은 표정을 바꾸고 세찬 비를 뿌려 온 몸이 젖은채 집에 돌아와보니 신발도 나같이 푹 젖어있었다. 말려도 꿉꿉한 냄새가 나는게 너라고 어차피 또 금방 너는 젖게 될꺼라고 햇살까지는 욕심이라고 하늘이 말하는 것 같아서 욕실에 신발을 던져두고 잠깐 젖은 몸으로 망연자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즐거운 표정으로 나를 좀 먹고 있는 괴물을 발견하고 이야기에 담아본다.
- 김경태, #27, 20240726.
PM 10:30 블암산 정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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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불암산에 올랐다.
오후에도 비가 계속 내렸지만 저녁 7시 부터 내일 오전까지는 비소식이 없어서 지난주보다 한 시간 늦게 6시가 다되어 집을 나섰다. 6시 20여분 상계역에 내릴때까지도 밤새 내릴것 같은 폭우가 내리고 있었지만 정상 도착할때쯤이면 그치겠지 생각하고 판초우의를 입고 산행을 시작했다. 이십여분 올랐을까 정상을 향한 돌계단 길은 어느새 계곡이 되어있었고 돌계단 앞을 둘렀던 입산 금지 빨간 테이프는 끊어진 연처럼 나풀거리며 믈살에 치이고 있었다. 15초 정도 내려가야하나? 우회길이 있을까? 생각하다 나에겐 선택지가 없음을 상기한다. 무조건 정상을 향해 우회길을 찾아 올라간다. 상계쪽 등산로는 계곡을 따라 나있다 보니 곧곧에서 새로운 물길이 생겨나 있었고 그중에 제일 약하게 얕은 개울처럼 흐르는 물길을 따라 일단 산능선을 목표로 폭우를 뚫고 올라간다. 믿을건 방향감각과 두개의 스틱, 그리고 돌아가든 오래걸리든 난 정상에 도착할거라는 근거없는 목표의식.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가 있고 길이 없어져도 올라야하는 때가 있다. 내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도 끝까지 올라야하는 때가 있다.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가거나 길을 잃고 못 올라가는 선택지따윈 없다. 세상에서는 경고에 멈춰야했고, 길이 없어져 멈춰야했고, 그럼에도 도전하다가도 결국 중도에 포기해야했고, 때론 길을 잃어서 해매다 목표점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이곳에선 아니다. 이곳에선 끝까지 도달할수 있다. 스스로를 믿어주는 연습을 하자, 스스로에게 끝까지 해내는 경험을 시켜주자.
그렇게 무너진 길과 암릉을 넘어 1시간여를 우회해서 주능선에 간신히 도착하니 이미 어둑해지기 시작했지만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내 몸에 물한모금, 내 두눈에 열린 하늘과 뻥 뚤린 풍광, 내 두다리엔 앉아서 쉼. 그리고 몸이 지치고 한계에 다다를수록 마음엔 더이상 소란스럽지 않고 정신은 깊이 있게 파고들길 멈춰선다.
그렇게 비와 땀에 푹 젖은채로 정상에 도착하니 그저 시원한 바람과 조용히 반짝이는 도시의 빛이 하나씩 늘어난다. 세상에 있을땐 그렇게 소란스럽기만 할뿐인데 이만큼 떨어져 바라보면 하늘의 별빛과 다름없이 그저 묵묵히 밤을 비추며 새벽을 기다릴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빛에 기대어 이 밤을 보낼 쉼터를 정상 아래 마련한다.
짧은 하룻밤이지만 혼자가 되어야 하는 그런 날이니까. 누구에게도 상처 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을 만큼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서야 간신히 꺼내어 놓고 찬찬히 찾아보고 흘리는 피를 닦아낼 수 있으니까 마음은. 숨막히는 산행을 통해 간신히 숨구멍을 찾고 막힌 숨을 흘려보내고 다시 숨을 참고 잠수함이 되어 세상으로 돌아가고 또 숨을 쉬기 위해 산이든 어디든 찾아나서고 돌아가고를 반복해야한다. 원자력잠수함처럼 강해지면 안그래도 될텐데, 난 배수량도 작고 구식의 디젤 잠수함이라 어쩔수가 없다.
- 김경태, #28, 20240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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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7월은 어땠나요?
저의 7월 한 달을 잘 표현하는 7월의 어느 아침 혼자 강원도 정선에 있는 민둥산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길을 걸으며 찍은 영상을 공유드려요. 삶은 뚜벅뚜벅 그렇게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거죠🥾🥾.
일자영활 방학 특집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했네요~ 8월을 다시 노려보겠습니다~👍
페이블에 3명의 작가분들 더 합류한 덕분에 42주 챌린지에 10명의 작가분들이 참여해서 역대 최다인 33개의 문장들이 꽃 피운 뜻 깊은 한달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다양한 색채로 저마다의 색깔을 담은 글들이 꽃 피우는 FABLE 기대해주세요~🤩
님~!
'42주 챌린지' 계속 관심 가져주시고 구독 끊지마시고 '일자영활'에도 일정되시면 같이 체험하며 2024년 끝까지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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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8월 역시 '일자영활(일상의 자극과 영감을 주는 활동)' 정규 일정은 여름방학으로 쉬어가고 9월부터 다시 시작하려고합니다.
7월 번개로 진행하려고 했던 '드로잉카페', '서울야경 투어' 등은 8월에 일정을 보며 추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독자이신 경우 따로 알림 요청 주시면 맴버들 단톡방 공지외에 개별적으로도 안내드리겠습니다.
여름방학에도 '일자영활'은 계속 됩니다😎
👏그리고 '일자영활'은 누구나 각자 호스트가 되어 개별의 주제와 일정으로 진행하실 수 있습니다. 님만의 일상에 자극과 영감을 주는 찾아서 혼자 하셔도 되고, 함께하고 싶은 활동은 언제나 공유하고 초대해서 모두와 함께 하셔도 됩니다. 일자영활에 대한 공지는 지금은 제가 호스트인 활동만 뉴스레터에 담고 있는데 미리 말씀해주시면 뉴스레터에 내용을 담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자영활의 게스트는 활동작가가 아닌 구독자분들도 참석 가능하고 지인분과도 같이 참석 가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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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ble>은 맴버들과 연간 다양한 활동과 글쓰기 '42주 챌린지'(2월 부터 11월까지 매주 한 줄이든 한 문장이든, 이야기 한 편이든 자유롭게)를 함께 하며 페이지를 채워나가고 연말에는 글과 활동 사진을 엮어 한 권의 책을 완성하려고 합니다.
님의 일상에도 한 방울의 영감을 더해주는 <Fab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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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BLE>
발행인 : 옆집오빠
편집장 : 허작가님
활동작가 : 유하선, 이현주, 김경태, 전수림,
박경선, 안경준, 홍경은, 편혜정, 강하람, 안은진
kyeongtae_kim@worldvision.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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